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민주주의의 회복’이니 ‘민주세력의 연대’니, 지방선거가 다가오고 바야흐로 민주주의라는 말의 홍수다. 그런데 민주주의란 대체 무엇인가? 역시 어원 그대로 ‘인민의 자기 지배’가 가장 보편적인 정의일 것이다. 인민이, 부자나 권력자가 아니라 노동자와 서민이 주인인 세상, 그게 민주주의다. 인민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건 단지 인민들이 언론이나 집회 결사의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니다. 실제 삶에서, 먹고사는 문제에서 평등하고 공정한 상태를 누리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인 건 인민들이 바로 그 실제 삶에서 끝없이 노예의 처지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 노동’은 그 가장 주요한 현실이다. 비정규 노동은 어느 사회에나 있지만 한국처럼 완전하게 자본의 이해만을 구현하는 경우는 없다. 한국의 비정규 노동엔 두 가지 의미만 존재한다. 총매출에서 노동자 임금의 비율을 최대한 줄여 자본의 몫을 최대화하는 것, 그리고 노동자의 단결과 조직력을 약화시켜 자본이 노동자를 멋대로 부릴 수 있도록 하는 것. 현재 비정규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56%인 850만인데, 임금은 정규 노동자의 49%이며 노동조합 조직률은 고작 3%다. 여기에 청년 세대로 갈수록 비정규 노동의 비율이 현격히 높아진다는 점을 보태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위기가 아니라 이미 파탄난 상태라 할 수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걸까? 자본의 탐욕 때문인가? 물론 자본은 탐욕스럽지만 탐욕은 자본의 본디 속성이며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한 그 탐욕은 어떤 식으로든 품고 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자본의 탐욕 자체가 아니라 자본의 탐욕이 사회적으로 발현되는 방식이다. 그걸 조정하고 관리하는 게 바로 국가권력이다. 국가권력이 자본 편에 서면 인민의 삶이 무너지고 적절히 제한되면 인민의 삶이 살아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 정권이란 바로 자본의 탐욕을 적절히 제한하면서 인민들의 살림을 현명하게 꾸려나가는 정권이다.
오늘 비정규 노동의 참상이 불과 10여년 동안 진행된 일이라는 사실은 국제적으로도 경이롭게 여겨지곤 한다. 그것은 한국의 국가권력이 지난 10년 동안 어지간히 열심히 자본 편에 섰다는 뜻이다. 그 10여년 동안 세 개의 정권이 존재했다. 그중 두 정권은 민주주의의 껍질을 앞세워 자본 편에 섰고 하나의 정권은 그 껍질마저 팽개치고 자본 편에 서고 있다. 그리고 그 두 정권을 맡았던 사람들이 그 ‘차이’를 내세워 오늘 다시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다.
“어떠세요. 겪어보니까 그래도 옛날이 그립지요?” 근래 그들 가운데 한 주요한 인사가 강연에서 했다는 말은 그들의 태도를 잘 드러낸다. 그들이 마치 인간이 어디까지 파렴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듯한 행태를 지속할 수 있는 건, 그들을 ‘그래도 현실적인 대안’이라 인정하는 사람들 덕이다. 어떻게든 이명박의 세상에서만 빠져나가면 살 것 같은 심정이야 누가 다르랴만, 그렇다고 해서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가장한 자본의 수호자’를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인정할 순 없지 않은가?
체험에서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희망이 없다. 우리가 지난 10년의 체험에서 분명히 배울 때, 이명박뿐 아니라 그 파렴치한 자본의 수호자들 또한 넘어서는 걸 고민할 때, 우리가 좌절과 무력감을 뿌리치고 저 너머 세상을 함께 상상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민주주의의 씨앗을 얻을 것이다.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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