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 2.1연구소 소장
며칠 동안, 눈이 왔다. 아주 많이 왔다. 운전하는 사람들은 눈을 싫어하지만 어쨌든 눈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고, 또 동심으로 돌아가게 해준다. 눈을 보면, 나는 행복해지고 짠한 마음이 든다. 우리 모두 언젠가 눈사람을 만들며 뛰어놀던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
이번 겨울은 아주 춥다. 지구온난화라는 말이 있고, 기후변화라는 말이 있다. 두 가지는 온실가스 때문에 생기는 같은 현상이지만, 느낌은 전혀 다르다. 온실가스로 교란된 지구 생태계는 그 변화 과정에서 더워지는 현상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한파, 혹설 혹은 해일 같은 것들을 동반하게 된다. 그래서 온난화 현상을 다루는 국제기구의 공식 명칭이 ‘유엔 기후변화협약’이 된 것이다. 기후가 변하면서 아주 더운 일도 벌어지고, 아주 추운 일도 벌어진다. 그리고 점점 더 그렇게 될 것이다.
생태와 빈곤은 아주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더워지든 혹은 추워지든,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더욱 힘들어진다. 왜 하늘은 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이렇게 시련을 내리는 것인지, 겨울에는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 살기 힘들다. “없는 사람들에게는 겨울이 제일 힘들다”는 얘기가 괜히 나온 것은 아니다. 솔선수범, 온도를 낮추는 청와대 직원들의 어려움과 눈 오는 날 축사와 그린하우스의 눈을 치워야 하는 농민들 그리고 연탄불로 버텨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의 크기가, 아무래도 같지는 않을 것이다. 식품이든, 기후든, 하다못해 발암성 오염물질까지, 대부분의 생태적 고통은 평등하지 않고 빈곤한 사람들에게 더욱 가혹하다.
이번 겨울, 아마 눈은 물론 한파 연속기록도 지난 100년 기록을 갈아치울 태세이고, 전통적인 삼한사온이라는 한국식 날씨도 이번 한파에는 영 소용이 없다. 눈도 많이 내리고, 춥기도 춥다. 살다보니 한국이 아닌 곳에서도 꽤 여러 군데에서 겨울을 보냈던 기억이 있다. 폭설이 오면 티브이와 언론을 장식하는 얘기들 가운데 가장 앞에 있는 뉴스들은 눈을 치우는 얘기보다는 노숙자들을 긴급 대피시키기 위한 지자체와 경찰들의 대응 그리고 추위를 넘기기 어려울 것이 뻔한 사람들에 대한 긴급 구호 대책에 관한 얘기들이다. 그렇게 하는데도 조금만 추워지면 새벽마다 간밤 추위로 동사한 사람들 소식으로 많은 사람들의 애를 태웠다. 겨울이 있는 나라들은 겨울나는 게 늘 이런 형태였다.
혹한을 맞으면서 언론에서 불행한 소식이나 겨울밤을 나기 위한 노숙자들을 위한 긴급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기이한 침묵이 흐르고 있다. 과연 우리 주위에는 추운 사람도 없고 동사자도 없을까? 방송과 신문만 보고 있으면 눈 때문에 도로가 막히는 것 외에는 우리 주변에서 아무런 일도 밤새 벌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도 그렇게 한국에 정감이 넘치고 인정미가 강물처럼 흘러 추운 밤, 어떤 노숙자도 추위에 떨지 않고, 긴급 구호가 필요한 사람이 한명도 없이, 정말로 모두가 안녕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게 어렵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는 있지 않나. 정말로 아무 일도 없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어느덧 너무 무심해진 것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정말 괜찮은 건지, 진짜 보도 통제가 있는 건지… 알 도리가 없다.
아직도 겨울은 길게 남았고, 혹한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이 추운 밤을 누군가는 어렵게 넘기고 있고, 그들에게는 우리의 따뜻한 손길이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언론에 주어진 또다른 공공성, 겨울날 긴 밤 다들 안녕하신지 우리 좀 챙겨보자.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혹한과 혹서, 언론에 새로운 역할이 요구되는 시간이다.
우석훈 2.1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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