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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가는 길 막지 마라 / 미류

등록 2010-01-10 22:48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짜고짜 경찰에 붙들렸다. 2006년 평택 미군기지 확장을 막기 위한 싸움이 한창일 때였다. 바로 전날 평택 대추분교에서는 경찰과 군인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방패로 찍고 진압봉으로 내리치며 연행했다. 그날 함께하지 못한 부끄러움이 나를 평택으로 이끌었다. 몸과 마음을 다친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과 함께 평화공원에서 저녁식사를 나눴고 서울로 가는 동료의 차를 얻어타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전경들이 달려와 길을 막아섰다. 이미 해가 져 어둑어둑한데다 사람도 별로 다니지 않는 길을 막으니 황당할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며 길을 터주라고 말했지만 꿈쩍 않는다. 이미 아홉 시가 넘어 집에서 몸을 뉘고 싶은 마음은 가득한데 내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길을 막는 이유라도 들으면 좋으련만 일언반구 막무가내다. 갑자기 “모두 연행해!”라는 지휘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에 누가 또 있나 봤다. 전경들 앞에 서 있는 네 명의 동료를 연행하라는 말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에 붙들린 건 내 팔이 분명했다.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연행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고 또 물어도 대답이 없다. 무작정 끌고 갔다. 오십 미터 정도를 끌려가니 사복을 입은 경찰들이 우리를 넘겨받았다. 다시 물었다. 우리를 연행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역시나 묵묵부답이었다. 그렇게 경찰서 유치장까지 끌려가 48시간을 하릴없이 갇혀 있었다.

경찰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길을 막고 왜 어디로 데려가는지도 말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끌고 간다면. 그런 걸 흔히 사람들은 유괴나 납치라고 한다. 동일한 상황이 유괴나 납치로 불리기도 하고 체포나 감금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간극이 바로 성찰이 요구되는 자리다. 무엇을 위해, 누가 누구를 가둘 수 있으며 길을 막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을 잊은 사회는 범죄가 합법화되는 사회일 뿐이다.

그날의 연행으로 검찰은 나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이라며 기소했다. 고등법원까지 간 재판 끝에 나는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그리고 당시 나를 체포하고 구금하는 데 관여한 경찰관들을 고소했다. 내가 한총련 깃발을 든 무리와 함께 국방부의 철조망을 절단하고 달려가고 있었다는 드라마를 쓴 경찰관은 공문서를 허위작성한 죄를 포함해 고소했다.

기어이 고소하겠다고 마음을 먹고서도 이 일 저 일 다른 일들에 밀려 지난 연말에 겨우 했다. 사람 가는 길 막거나 잡아 가두면서 경찰이라는 이유만으로 떳떳해질 수 있는 현실을 바꾸는 데 조금, 아주 조금은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다. 그러나 경찰뿐이랴. 작년 한해만 돌아봐도 가는 길 막힌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강제퇴거에 저항하던 이들이 구속과 수배로 집으로 가는 길이 막혔고, 값비싼 등록금으로 대학생들 학교 가는 길이 막혔고, 문자로 해고통지받은 노동자들 직장 가는 길이 막혔다. 4대강 살린다며 강이 흐르는 길도 막는다니….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을 위해 누가 누구의 가는 길을 막는가. 사람들 살아가는 길을 막을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세밑에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하늘나라로 가던 길 막혔던 철거민 열사들 돌아갈 길이 열렸고, 교육청의 해임으로 학교 가는 길 막혔던 해직교사들의 길도 열렸다. 새해에는 누구도 가는 길 막히지 않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겁없이 빌어본다. 물론 대통령 가는 길을 국민이 막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그것 말고는, 누구도 가는 길 막지 말라.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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