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별아 소설가
이따금 시와 소설의 차이를 따지는 질문을 받으면 “시가 천상의 예술이라면, 소설은 천민의 예술”이라고 답하곤 한다. 이 세상에서(어쩌면 저세상에서도) 아들 다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소설인 터에 언감생심 비하나 폄하의 뜻일 리 없고, 소설이라는 장르가 갖는 고유의 속성을 나만의 애정표현 방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소설은 결코 아름답고 순결하고 고상하기만 할 수 없다. 고리키의 말대로 ‘인간학’에 다름 아닌 그것의 풍미는 삶의 진창에 코를 박고 짓무른 상처에 뺨을 비빌 때에만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무 살 무렵에 박래군 선배를 처음 만났을 때, 농투성이같이 시커멓고 허름한 그의 외모가 “소설 좀 쓴다”는 주변의 소개와 그럴듯하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탁주처럼 걸쭉한 입담과 사람 좋은 너털웃음으로 미루어보아 이문구풍의 농촌소설을 쓸 것도 같고, 해고자들과 함께 한미은행 점거농성에 들어갔다 구속된 ‘은행 강도’ 이력으로 보면 조세희풍의 강강한 리얼리즘 문학의 전통을 이을 것도 같았다. 아니, 작가의 외모를 통해 작품의 경향을 넘겨짚는 짓이야말로 하수라고 생각하면, 투박한 그의 손끝에서 의외로 모던한 실험적 문학이 흘러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대학 문학상을 받은 화려한 경력을 차치하고, 결국 나는 그의 소설을 읽어보지 못했다. 더러운 시절이 문학청년을 투사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시절을 탓하는 건 지나치게 단순하고 아무래도 부질없다. 힘없고 약한 사람에게는 어느 시절이라도 더럽고 고단하지만, 그 시간이 강산이 세 번 바뀌는 30년에 이르러서는 아무리 더러운 시절이라도 끝끝내 싸우며 견디기에 버겁다. 대부분이 슬금슬금 뒷걸음쳤다. 꿈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욕망과, 책임이라고 불리는 식솔들의 안위와, 이른바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잔치가 끝난’ 그곳에 박래군, 그가 남았다. 현재 그의 ‘공식’ 직함은 ‘이명박정권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이란다. 그 이름으로 순천향대병원 장례식장과 명동성당에서 10개월 동안 수배생활을 하고, 1년이 지나서야 치러진 희생자들의 장례식과 삼우제를 마친 후 경찰에 자진출석했단다. 그의 이름 뒤에 붙은 덕적덕적한 직함들은 지난 세월만큼이나 길다.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사무국장,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 범대위 언론담당위원까지… 두 살 터울 동생인 박래전 열사가 스물여섯이 되던 1988년에 “광주는 살아 있다”고 외치며 분신한 후 그는 지금까지 역사와 사회와 동생에 대한 약속을 지키며 살아왔다. 유가협에서 같이 일했던 이행자 시인이 “박래군 같은 사람이 다섯 명만 있었다면 나라 꼴이 이 지경은 아닐 것!”이라고 호언장담할 정도로 그는 ‘타고난 활동가’이자 ‘운동진영의 보배’로 손꼽혀왔다. 같은 과 선후배라는 얕은 인연만으로도 그런 평판이 뿌듯하지만, 웬일인지 내 마음 한편에는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는 래군이 형에 대한 안타까움이 자리잡고 있다. 한번이라도 이놈의 ‘문학병’에 걸려 앓아본 사람이라면 이루지 못한 꿈이 어떻게 평생을 깔깔하게 뒤좇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 그는 예의 싱검털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소설은 쓰겠다는 사람도 잘 쓰는 사람도 많지만, 이 일은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잖아!” 그랬나 보다. 래군이 형은 여전히 가장 낮은 곳에 있지만 이제는 진짜로 아름답고 순결해져서 소설 같은 천역에는 어울리지 않나 보다. 유난히 차가운 올겨울, 부디 그가 더는 춥지 않길 빌 뿐이다.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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