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시인
2010년 벽두부터 눈이었다. 살면서 그런 큰눈은 처음이었다. 일산 집에서 직장이 있는 파주까지 삼십분이면 족할 출근길에 근 네 시간 반을 잡아먹혔다. 기가 막혔다. 맨발의 아베베가 1960년대에 세운 기록이 두 시간 십오 분 정도이니 마라톤으로 치자면 연이어 두 번의 완주를 할 수 있을 만큼이 아닌가. 뭐야, 이거 미친 거 아냐. “따블, 따따블”을 외쳐도 오지 않고 잡히지 않는 택시였다. 시동을 끈 채 하염없이 눈이나 맞고 있는 버스였다.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맨 처음 땅을 파고 지하철이란 걸 놓자고 한 이는 그야말로 천재라고!
물론 사람들은 눈을 예측했다. 강추위 대비란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저 내키는 대로 저 하고픈 대로 저 자신을 흩뿌리는 눈의 천진함 앞에서 우리들은 구부러진 무릎으로 오리걸음에 도둑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뒤뚱뒤뚱 아침마다 쌓인 눈을 밟으며 출근했다. 모두가 살금살금 밤마다 언 눈을 밟으며 퇴근했다. 우리들 중 무릎을 바싹 펴고 걷는 이는 단 한 사람, 아파트 경비인 박씨 아저씨뿐이었다. 귀마개를 쓰고 털장갑을 낀 채 장화 신은 발로 아침저녁 바삐 오가며 큰 삽으로 눈을 치우는 이는 아저씨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택배상자를 찾으러 경비실에 들렀다. 작은 난로 앞에 앉은 아저씨는 연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헤 벌어진 입속에서 침이 쭉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다디단 잠에 빠진 아저씨를 깨울까 말까 망설이는데 난데없이 인터폰이 울렸다. 아…예…어, 거긴 치웠는데…그래서 다쳤어요?…어쩌나…죄송합니다. 아저씨 무슨 일 있대요? 애가 넘어졌다고 뭐라 하시네요, 그늘진 데는 아직 다 못 치웠는데, 많이 다쳤으면 큰일인데. 아이 참 그걸 아저씨 혼자 어떻게 다 치워요? 자기네가 조심하든가. 버겁긴 해요, 집집마다 한 사람씩 나와서 십분만 치워도 아파트 참 말끔해졌을 텐데. 요즘 사람들은요, 문 닫아걸면 그게 모르쇠예요. 그런데 사모님 택배 남편분이 좀 아까 가지고 가셨는데 왜 나오셨어요?
헉! 사모님이라니요, 아저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 혼자 살잖아요. 순간 아저씨의 얼굴이 하얗다 못해 쪄낸 지 이틀 지난 백설기처럼 굳어졌다. 아니 내가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자기가 2004호 남자 주인이라면서 갖고 올라가겠다고… 가만 사인한 것 보면 알아요. 이름이… 어라, 노인정이네. 남편이 혹 노인정씨예요? 오우, 노우, 아저씨!
결국 택배 상자는 찾지 못했다. 아저씨는 몇 번이나 경비실 안에 쌓여 있는 택배 박스를 이리 다시 쌓고 저리 다시 쌓아가며 송장 이름을 일일이 확인했다. 내가 주문한 것은 기다란 두 귀가 제 키보다 큰 흰 토끼인형이었다. 게다가 물고 빨아도 인체 무해한 친환경 흰 토끼인형이었다. 속이 쓰렸다. 그렇다고 제값을 똑 부러지게 물어내라 요구할 수는 없는 일. 아저씨는 말했다. 내가요, 요즘 들어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뱃속을 열면요, 쓸개도 없고 장도 이만큼이나 잘라내서 없어요. 속이 비어서 그런지 자꾸 까먹습니다, 사모님. 제 한 달 월급이요, 세금 떼고 나면…. 아이 참, 아저씨 저 사모님 아니라니까요.
큰눈 그친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큰눈 소식이다. 귀마개를 쓰고 털장갑을 낀 채 장화 신은 발로 아침저녁 아저씨는 아파트 안팎을 쏘다니느라 바쁘시다. 머리가 훌렁 벗겨진 아저씨는 나만 보면 모자가 벗겨질 정도로 인사를 하신다. 그깟 토끼인형이 무슨 대수라고, 따지고 보면 나는 제 마당에 쌓인 눈도 비질 안 하는 싹수인데. 눈이다 싶은 순간 피로회복제나 사러 가야겠다. 왜? 나는 얍삽하니까!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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