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희종 서울대 수의과대 교수
현직 대통령이 부하에 의해 사망하고, 무장 군인이 일반시민을 학살하는 현실 속에 대학시절을 보낸 나에게 계엄이란 말처럼 복잡한 느낌을 주는 말은 흔치 않다. 나에게 계엄은 국가비상사태에 행정부가 입법부나 사법부의 기능을 제한하고 국가원수의 막대한 권한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식의 설명보다는, 비록 젊은 시절의 치기 어린 정의감으로 길거리에 나섰어도 전문운동권이 되기보다는 여전히 왜 사는가라는 실존적 질문이 중요했던 청춘 시절의 방황과 이어져 있다.
이제 50대가 되어 나는 또다른 계엄을 경험한다. 현 정권이 들어선 이후 대통령의 의지는 거대 여당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관철되지 않은 적이 없다. 평화적 촛불과 용산 철거민에 대한 일방적 무력 진압, 무시된 각계각층의 시국선언, 언론관계법, 4대강 사업, 세종시 수정 등 사회의 많은 갈등과 분열을 불러일으키고, 반대 의견을 가진 각계각층에 대한 집요하고 철저한 탄압 행위를 보면서 과거 내가 경험했던 계엄 상황이 떠오른다. 이미 일당 체제인 국회는 행정부를 견제하기보다는 정권의 대변인이 되었고, 공정하고 균형 잡힌 자세를 가져야 할 검찰은 정권의 집행인으로 전락했다. 사법부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권력의 입장을 대변하며 사법권의 독립을 훼손한 이가 여전히 대법관으로 있다.
이미 우리 사회는 삼권분립이 존재하지 않는 계엄 상황이다. 과거 계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자신의 위치를 벗어난 군부 세력이었고, 지금은 사회 비판의 본래 사명을 저버린 언론집단이다. 재벌 총수의 단독 사면이나 대기업의 세종시 땅 특혜에 대한 보도에서 보듯이 정권과 재벌에 결탁한 언론의 행태는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있다. 이들은 견해가 다른 법원 선고에 대해서는 판사 개인 신상마저 공개 비난하며 여론몰이를 통해 사법부의 독립성을 철저히 말살하려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 판사의 소신 있는 판결이 가능할까.
독재정권 시절의 계엄이 노골적이었다면 지금 우리가 겪는 계엄은 군홧발을 대신한 검찰의 칼날과 더불어 국회와 언론의 도움으로 소리 없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다. 독재에 의한 대부분의 계엄 상황이 국민의 저항으로 붕괴되었는데도 계엄 상황을 맞이한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된 반대세력의 결집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재벌과 언론의 비호를 받는 현 정권이 만들어 내고 있는 계엄 상황의 은밀함에서 비롯되는 애매모호함 때문이다. 이런 모호함이 있기 때문에 개발과 경쟁논리 속에서 무시당하고 착취당하는 서민들조차 계엄중에 언제나 등장하는 화려한 미사여구와 홍보에 넘어가고 있고, 그 결과 계엄 상황에 반대하는 것은 국익에 반대하는 좌빨들의 소리라는 유치한 선동에 지하벙커 속 제왕적 통치자에게 높은 지지를 보낸다.
건강한 사회는 진보와 보수의 다양한 생각이 존중되고 국민의 뜻이 실현되기 위해서 정권의 일방통행을 막는 이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현실이 더욱 착잡한 것은 모호함으로 포장된 현 계엄정권에 대하여 그나마 저항할 수 있는 대안세력이 전형적인 진보진영이 아니라 과거 군사독재의 후예라는 점이다. 물론 현재의 모습이 중요한 것이므로 선대의 몫을 그 후손에게 무조건 짊어지게 하는 것은 매우 폭력적인 잣대이다. 여당 내의 갈등이란 형태로 진행되는 지금의 형국에서 여전히 국민은 제삼자이고 그저 정당 내의 주도권 다툼의 수준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분명한 것은 혹독한 계엄의 시대를 넘어 민주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보수와 진보, 여야를 떠나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며 소통하려는 힘을 모아 국민을 위해 이 은밀하고 모호한 시절을 변화시켜야 한다.
우희종 서울대 수의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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