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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판사 발가벗기기 / 박찬수

등록 2010-01-20 22:08

박찬수  부국장
박찬수 부국장
격세지감이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엔 법원을 ‘정권의 꼭두각시’라고 비판하는 민주진영 목소리가 거셌다. 이젠 거꾸로 보수세력이 판결을 문제삼는 일이 잦다. 그것도 단순히 판결의 정당성을 따지는 논쟁이 아니다. 판사의 과거 전력과 이념을 집요하게 캐고 들어간다. 연쇄살인범의 성장 과정을 추적하는 건 재발 방지의 교훈이라도 던질 수 있지만, 이런 식의 집요함은 불쾌하다. 사상의 자유란 게 우리 사회에 있는 건지, 누구든지 저런 식으로 해부당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서다.

법원의 두 결정, 강기갑 의원 무죄 선고와 용산참사 수사기록 공개를 비난하는 움직임은 거의 총공세에 가깝다. 검찰과 보수언론에 더해, 한나라당은 사법제도 개선을 모색하겠다고 나섰다. 이 기회에 법원을 사상적으로 정화하겠다는 결기마저 느껴진다. 왜 보수는 저리 흥분하는 걸까. 이미 정부와 의회를 장악했는데, 뭐가 모자라 1년 수만, 수십만 건의 판결 중에서 불과 몇 개를 참지 못하는 걸까.

‘진지론’의 환상 탓일 것이다. 작가 이문열씨는 몇해 전에 “대한민국의 가치를 지킬 진지들이 (진보세력에) 함락됐다”고 말했는데, 문화계뿐 아니라 이젠 법조계까지 진보세력에 잃을지 모른다는 착각 때문이다. 진지론의 관점에서 보면 법원은 여러 진지 가운데서도 보수의 가치에 가장 충실해야 할 핵심 기지다. 그런데 그 진지가 1980~90년대 대학생활을 한 ‘386 운동권’ 출신 판사들에게 함락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는 것이다. 모든 걸 보수-진보 대결의 관점에서 보고, 지키고 획득해야 할 진지로만 본다. 공존과 화합은 안중에도 없다.

법조계가 과거와 다르다는 그들의 생각이 전혀 틀린 건 아니다. 그러나 진단이 잘못됐다. ‘문제 판결’의 중심에 과거 운동권 출신 판사들이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은 1차원적이다. 변화는 동일한 경험을 가진 세대로부터 나온다. 서울지역의 지방법원에서 판사를 하는 대학 동기는 이런 얘기를 했다. “지난해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개입 논란에 분개한 판사들 중엔 우리법연구회 소속이 아닌 사람들이 더 많다. 운동권이든 아니든 80~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들에겐 일종의 공감대 비슷한 게 있다. 그걸 이념적으로 ‘진보’라 규정할 수는 없지만, 뭐랄까 ‘독립적 판결’에 대한 강한 애착일 수도 있고, 아무튼 과거와는 다른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

시대는 변한다. 법원도 변하고 판결도 변한다. ‘이단’이란 논란에 휩싸인 판결이 수십년 뒤 주류 판결이 되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보수세력은 법원의 몇몇 판사들을 콕 집어내면 되리라 생각하겠지만, 우리 현대사에서 수십년의 민주화 투쟁 시기를 지워버리지 않는 이상 변화를 막을 수는 없다. 지금 보수의 격한 반발은, 사실은 민주주의의 진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속마음의 표현일 수 있다.

현대의 가장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판결을 꼽으라면, 2000년 미국 대선의 승패를 가른 연방대법원 판결이 빠지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재검표를 하면 앨 고어 민주당 후보가 이기리란 전망에도, 연방대법원은 조지 부시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 판사의 다수가 보수파였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민주당은 승복했다. 그걸 ‘법과 제도를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힘’이라고 칭찬했던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판결 하나에 이렇게 야단법석을 떠는 건 너무 협량하다. 진정 잘못된 판결이라면 수년, 수십년 뒤엔 자취도 없이 잊혀질 것이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좀더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 아량과 품위는 원래 보수주의의 덕목이 아니던가.

박찬수 부국장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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