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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곽병찬칼럼] 우리 곁의 좀비들

등록 2010-01-26 21:55수정 2010-01-27 17:19

곽병찬 편집인
곽병찬 편집인
고대 로마의 스파르타쿠스 난 이후 가장 빛나는 노예해방전쟁은 아이티의 흑인노예들에 의해 치러졌다. 이들은 스페인·프랑스·영국 등 서구 열강과 맞서 역사상 처음으로 해방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바로 그 승리 때문에 아이티의 비극은 시작됐다. 서구 열강은 노예해방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아이티를 철저하게 고립시키고 빈곤과 저개발을 강요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반문명, 야만 탓으로 돌렸다. 민속종교인 부두교에 식인·광기·음란 등의 낙인을 찍었고, 아이티인들 하면 좀비(살아있는 시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미국의 대표적 기독교 근본주의자인 팻 로버트슨 목사가 아이티 지진참사에 대해 던진 한마디는 상징적이다. “독립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아이티에 대한 신의 저주!”

좀비는 부두교 신앙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기독교에 악마가 있고 마녀가 있다면, 부두교에는 악령(로아)이 있고 좀비가 있다. 기독교에 악령을 쫓는 퇴마사가 있다면 부두교엔 악령을 쫓거나 포획한다는 주술사 혹은 사제가 있다. 부두교는 아프리카 여러 부족의 민속신앙이 가톨릭의 제의적 요소와 결합한 것일 뿐, 다른 종교와 바탕이 다르지 않다. 다만 흑인노예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여러 요소를 재조합했다는 점에서 역사적·민속적 요소가 강할 뿐이다. 실제로 부두교는 아이티 노예해방운동의 구심점이었으며, 최초의 전투적 결사 역시 부두교의 제의 속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부두교의 좀비는 서구가 널리 퍼뜨린 좀비와 다르다. 부두교의 좀비는 주술형과 형벌형 두 가지가 있다. 떠돌아다니며 인간을 괴롭히거나 사악하게 만드는 악령을 주술사가 주검 속에 가둬버린 것이 주술형 좀비다. 형벌형 좀비는 교리나 공동체 규범을 어긴 사람에게 좀비 파우더를 먹여 만든 경우다. 파우더는 보통 복어나 타란툴라의 독, 두꺼비의 침 등을 섞어 만든다. 파우더를 먹게 되면 어떤 의지나 판단도 없고 고통도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시체’가 된다. 이런 좀비는 오로지 주술사의 지시에 따른다고 한다. 아이티인들이 목숨 걸고 거부했던 노예상태를 종교의 형벌 요소로 끌어들인 셈이다.

서구인들이 영화와 게임 등을 통해 전파한 좀비는 속성상 후자에 속한다. 주술사에 의해 만들어지고 조종당하며, 영혼을 빼앗겼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주술사를 악령의 화신으로 간주한다거나, 때문에 좀비가 악령의 지시에 따라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는 점에선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부두교는 좀비를 권선징악 차원에서 이용하고, 실제 대부분 노동에 이용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로버트슨 목사가 말하는 악마와 계약을 맺은, 계약형 좀비는 오히려 선진 기독교권 국가에서 많이 나타난다. 그 원전은 성서에서 악마가 예수에게 부귀·명예·권력을 제시하며 영혼을 팔 것을 요구하는 대목일 것이다. 신분사회에서 계약사회로 전환하면서 영혼을 팔고 사는 일은 흔해졌다. 특히 자본과의 계약에선 선의, 신뢰, 배려, 타인 존중 등 인간적 가치를 포기하고 돈을 취하는 경우가 생겼다. 물신, 물신숭배, 자기소외 등은 이런 현실을 반영한 지적들이다.

더 잔인한 것은 권력과 계약한 경우다. 승진의 노예가 되어 공익의 대표자로서의 책무를 내팽개친 검찰, 종편 등 이권의 노예가 되어 언론이기를 포기한 수구매체들, 권력의 노예가 되어 국민과의 약속을 일쑤 뒤집는 정치인이 그들이다. 그 정점엔 악령의 주술사로서 최고권력이 있지만, 이들은 자발적으로 인간적 가치를 파괴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남 얘기가 아니다. 우리 현실이다.

곽병찬 편집인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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