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 교육평론가
2000년대 뉴라이트를 탄생시킨 우파 사상운동은 ‘자율이냐, 규제냐?’라는 프레임을 유행시켰다. 질문 속에 이미 ‘자율이 좋아요’라는 정답(?)을 내장하고 있는 이 프레임은, 경제 영역에서 시작되어 여타 영역으로 확산되었다. 알다시피 이명박 정부 교육정책의 기조도 ‘자율과 경쟁’이다. 그런데 정작 교육현장에 자율의 바람이 분다는 얘기는 들을 수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자율’이 두가지 이유에서 실상 자율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번째 이유는 그것이 교사와 학생의 자율이 아닌 권력자들의 자율이라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는 교육감이나 교장에게 권한을 이양하는 이른바 ‘학교자율화’를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예컨대 교장이 0교시·우열반을 시행하거나 과목별 수업시간을 증감하기로 결정하면 학생과 교사는 좋든 싫든 따라야 하므로, 이들의 자율권 신장은 곧 학생·교사의 자율권 약화이다. 학교의 주인이 교사와 학생이어야 한다는 당위론에 비춰 보나, 자율의 단위가 집단이 아닌 개인이어야 한다는 고전적 상식에 비춰 보나, 이런 게 자율화라면 파리도 새다.
두번째 이유는 이 자율이 ‘경쟁’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경쟁을 시키려면 평가기준이 있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교육정책에서 일제고사가 그토록 중시되는 것은, 경쟁을 촉발하기 위해서는 표준화된 평가기준의 확보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특히 평가과목이 적을수록 경쟁을 관리하기 용이해진다. 마침 우리나라는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을 먼저 겪은 영국·미국보다 훨씬 획일적인 국영수 중심 평가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일제고사는 말할 것도 없고 교육과정과 수능시험까지도 국영수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몰아간다.
결국 이명박 정부 교육정책의 기조인 ‘자율과 경쟁’ 가운데 자율은 경쟁의 종속변수로서, 교사와 학생 개개인 수준의 자율을 배제한 허위개념에 불과하다. 원리적으로 자율이 경쟁에 종속되어 있는 한, 교사와 학생에게 제대로 자율권을 부여하기란 불가능하다.
교사와 학생의 자율권을 제약하는 요인은 어떤 것들일까? 석차를 요구하는 내신평가제도, 과다한 과목과 분량을 강제하는 교육과정, 과목 선택이 불가능한 교육환경 및 이에 유착된 문과/이과 구분, 국영수 위주로 구성된 객관식 대입시험, 과다한 학급당 학생 수 등이다. 이 요인들은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주입식 교육의 원인과도 일맥상통한다. 대안은 수업과 평가를 탐구·체험·의사소통 위주로 재편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과 내신제도를 뜯어고치고, 상위 학년으로 올라갈수록 과목 선택의 자율권을 대폭 확대하며(특히 중·고등학교는 학점제로 전환하고), 대학은 전공에 따라 서로 다른 과목을 요구하는 것이다. 아울러 기존 교원승진제도를 교원평가와 전문성평가로 대체하고, 학급당 학생 수를 낮춰야 한다.
교사와 학생의 자율권을 대폭 확대하는 새로운 정책방향을 뭐라고 부를까? 나는 이것을 대담하게 ‘공교육 선진화’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이미 이명박 정부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공교육 강화’와 차별화되고, 저들의 교육이 ‘후진적’이라고 낙인찍는 효과가 있다. 서두르지 않으면 영영 기회를 잃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새로운 공교육의 구심이 될 만한 사람들이 이미 상당수 제도교육에 절망하여 대안교육 쪽으로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 참, 지난달 서울시 교육청에서 주입식 수업모델에서 탈피하고 논술형 평가를 늘리라고 지시하자, 며칠 전 정운찬 총리도 한마디 거든 모양이다. 하지만 안심(?)해도 된다. 이들은 절대로 이를 정착시킬 수 없다. 다만 왜 그러한지를 스스로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이범 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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