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편집인
설 연휴 가장 재수없는 화제는 세종시 문제였을 것이다. 현직 최고 권력과 유력한 차기 권력이 정면충돌하는 사안이고,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여당에 당론 변경을 공식 요구한 사안이었으니 화제에서 빠질 순 없었다. 그러나 한 집 건너 한 가구가 청년실업, 중년프리터를 안고 살아가는 형편에서 평지돌출한 정치싸움이니, 다짜고짜 짜증과 불만이 쏟아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찬반 논란을 떠난 터라 날선 말들은 하나의 표적을 향해 날았다. 이명박 대통령의 뜻에 따른 것이긴 했지만, 세종시 폭탄을 터뜨린 장본인 정운찬 총리가 그 표적이었다. 예민하던 말투는 곧 정 총리에 대한 비난과 조롱으로 화기애애하게 끝났다. 정 총리 덕분에 모처럼 만난 일가친척이 얼굴 붉힐 일은 없었다. 설 민심을 놓고 여야, 친이·친박계가 제 논에 물대기식 진단을 내놓고는 있지만, 비등하는 정 총리에 대한 비난 여론에서는 같았을 것이다.
물론 정 총리는 최선을 다했다. 마치 일제의 자살특공대처럼 세종시의 견고한 여론을 향해 돌진했고 거기에 흠집을 내고 불을 붙이긴 했다. 나라를 온통 소란의 도가니에 빠뜨리고, 여권을 난장판으로 만들었으며, 현재의 권력과 차기 권력이 정면충돌한 것도 그가 열심히 돌진한 결과였다.
그의 잘못이라면 하늘의 뜻과 땅의 이치에 어두웠던 것이었다. 지리에 어두워 그가 던진 폭탄은 아군의 항공모함에 떨어졌고, 천문에 문외한이었던 탓에 민심의 상처에 동티만 냈다. 상식마저 부족해 입법부의 기능을 수시로 무시했고, 그래서 여당으로부터도 따돌림을 받았다. 때문에 충청권의 민심 이반을 최소화하면서 수도권의 지지기반을 확고히 하며, 박근혜 전 대표의 발목을 붙잡으려던 이 대통령의 목표는 실종됐고, 그는 일찍이 의심받았던 트로이 목마로 낙인찍히기에 이르렀다.
보다 못해 이 대통령은 대역을 물리치고 직접 나섰다. 위험천만한 강도 공범론을 제기하고, 이례적으로 세종시 당론 변경을 한나라당에 공식 요구했다. 이에 따라 당권파는 원안을 폐기하기 위한 의원총회 소집을 추진하게 됐고, 친박계는 옥쇄의 의지로 맞서는 형국이 되었다. 여권은 내전 상태로 돌입했다. 정 총리로서는 할 말도 할 일도 없다. 친정부 매체들에서도 그의 용퇴론이 나오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여권이 공중전에서 지상전, 나아가 의총 표대결 등 육박전으로 확전되는 것은 여당의 집안 사정이다. 친정부 매체가 아니라면 굳이 안타까워서 안달할 이유도 성낼 필요도 없다. 그러나 문제는 생뚱맞은 세종시 논란이 자극한 시민들의 짜증이다. 100여일째 계속되는 논란으로 불쾌지수는 임계선을 육박했다. 바로 이런 상황 때문에 집권여당에 한마디씩 충고를 내뱉는 것이고, 할 일이 없는 정 총리에게 중차대한 역할을 재촉하는 것일 게다. 소동을 일으킨 입장에서 소동을 일단락지어야 한다. 그 계기는 그의 퇴진을 통해 조성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미 상식이 되어버린 출처진퇴를 깨끗이 하라는 사마광의 충고를 되새겨야 한다. 비록 ‘위에서 직책을 내리려 해도 좀체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군자의 자세는 이미 엎질러졌다. 다만 ‘자리를 떠날 때가 되면 지체없이 물러나’야 한다는 충고만큼은 유효하다. 정치적 기반도 없고, 천문지리에도 어두운 그는 여권에서 무동력선이나 다름없다. 대통령이 끌어줄 때만 그가 이끄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게 그의 처지다. 자리에 연연할 경우 앞으로 그에게 주어질 역할이란 고작 박 전 대표의 물귀신 구실뿐일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훈장을 역임했던 사람이 할 일은 아니다. 할 수도 없다.
곽병찬 편집인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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