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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공격받는 청소년 / 엄기호

등록 2010-02-21 19:49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한 무리의 학생들은 팬티만 입고 거리를 질주하고, 어떤 아이는 이 엄동설한에 바다에 던져졌다. 급기야 또다른 학생들은 선배들에게 불려나가 알몸으로 기합을 받으며 졸업을 ‘축하’받았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내가 봐도 이건 아닌 것 같다’며 평소 열렬하게 청소년의 인권을 옹호하던 친구조차 얼굴을 돌렸다. 여기에는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간혹 이 아이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구조적인 원인을 분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지만 대세는 강경한 일벌백계다. 그래도 철없는 아이들이 한 짓이 아니냐고 한마디 보태다가는 “요즘 청소년들은 이미 알 것 다 알고 하는 ‘인지범’들인데 무슨 사회와 교육 탓이냐”며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는 면박을 당하기 십상이다. 이처럼 ‘요즘 청소년’들은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공격받고 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 사회가 보수화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가 청소년들의 일탈행위를 사회의 도덕적 위기와 연결하는 것이다. 영국에서도 그랬다. 1970년대 말에 대처주의가 대중적 공감을 얻고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것도 청소년들의 일탈행위에 대한 좌파의 정책적 무능을 틈탄 것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은 학교가 폭력과 마약의 통제 불가능한 무정부상태로 치닫고 있으며 법과 도덕의 질서를 강력하게 세워야 한다고 보수적 매체를 통해서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이어 그들은 청소년들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정신 나간 좌파들이 무분별한 인권과 민주주의를 주장하여 학교를 혼란으로 몰아넣고 궁극적으로 국가를 위기에 빠뜨렸다고 비난하였다. 공격의 첫 대상은 청소년이었지만 애초부터 대처주의의 목표는 교원노조와 진보 전체였으며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진보의 가치 자체였다. 그 결과 영국 사회는 돌이킬 수 없는 강압적인 ‘법과 질서’ 중심의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하였다.

30년이 지났지만 한국의 진보는 이 사태에 대해 영국의 무능했던 진보들과 별반 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소위 진보적인 매체라는 곳을 살펴보더라도 이 문제에 대해 실체적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이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이고 학교와 가정에서는 어떤 존재들이고 이들의 또래집단은 어떻게 조폭처럼 되었는지를 이들의 이야기를 꼼꼼하게 듣고 분석하는 작업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저 어림짐작으로 폭력에 대한 감수성과 인성교육의 붕괴에 대한 하나마나한 개탄을 단순반복할 뿐이다. 이것이 보수주의가 노리는 것이다. 무능한 진보를 등에 업고 모두가 ‘요즘 청소년’들을 걱정하게 하여 도덕에 대한 위기의식과 규율에 대한 공감을 빠르게 확산시킨다. 다음은 민주주의와 인권이 아이들을 버렸다며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주범으로 전교조와 공교육의 무능을 집중적으로 지목하여 파상공격을 가할 것이다.

그 결과는 권위주의적 통치와 수월성 교육의 강화이다. 성공적인 학생 관리를 명목으로 특혜를 받고 있는 학교에는 더 많은 혜택을 줄 것이다. 그렇지 못한 학교와 학생들에 대해서는 그나마 있던 지원을 줄이고 더 많은 제재와 처벌이 주어질 것이다. 교사는 무능하다고 비난을 받을 것이고 아이들은 사회의 보호와 권리 바깥으로 내팽개쳐질 것이다. 이렇게 무법지대로 추방된 아이들은 도덕의 이름으로 영구히 쓰레기 취급을 받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통치 전략이다. 그런데도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이 보수주의의 도덕과 규율의 정치에 수수방관하거나 놀아나고 있다. 위기에 빠진 것은 청소년의 도덕이 아니라 도덕에 대한 진보의 정치적 역량이다.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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