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러너다 / 김민정

등록 2010-02-24 22:37

김민정 시인
김민정 시인




일이 참 많다. 그리하여 바쁜 척하느라 바쁜 나날이다. 세상에 나라님도 너만큼 공사다망하겠니. 모임 약속이 전해질 때마다 미안하다, 못 간다, 잘들 놀아라, 사과 아닌 핑계에 급급한 내게 친구들은 질투 아닌 질타로 연신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너 지금 솔로라고 우리 아줌마들 무시하는 거냐. 왜 이래 아줌마들, 아마추어같이. 중·고교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 여섯 가운데 결혼을 안 한 이는 나뿐이다. 당연히 아이가 없는 이도 나뿐이다. 당연히 ‘서방’이 없는 이 또한 나뿐이다.

요즘 친구들 사이에 유행하는 것은 둘째 낳고 셋째 임신하기다. 그들은 모여 앉기가 무섭게 산양 분유가 좋더라, 일본제 기저귀가 역시 다르더라, 전집은 꼭 공동구매로 해라, 영어 방문교사는 돌 되기 전부터 들여라 등 저마다의 육아법을 전수하고 전수받느라 분주하다. 그 옆에서 하품이나 하는 나는, 연신 커피나 리필해 마시는 나는, 밉상처럼 턱 쳐들고 앉아 물음표로 그네들의 말꼬리를 잡아채느라 분주하다. 그냥 끈 풀린 개처럼 말이야, 애들 풀어 키우면 안 되는 거야? 친구들이 쯧쯧 혀를 찼다. 선생인 내가 집으로 선생을 부르는 것만 봐도 모르겠냐. 모르겠다, 나는 혹시라도 결혼하게 되면 애는 무조건 운동선수 시킬 거다.

일이 참 많고 바쁜 척으로 바쁜 나날이지만 그래도 안 놓치는 한 가지가 있다. 스포츠다. 어릴 적 내 꿈은 세상에서 가장 멀리 뛰는 여자였다. 육상부를 나오면서 새로이 품은 내 꿈은 스포츠 뉴스의 기자였다. 어쩌다 시인이 되어 그로부터 멀어진 지 오래지만 여전히 내 꿈은 스포츠를 향해 있다.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그 도시에 머무는 여행자가 되겠다는 바로 그것.

요즘 밴쿠버 겨울올림픽이 한창이다. 뜻하지 않게 메달 소식이 전해지면서 스피드스케이팅에 가히 폭발적인 관심이 보태지고 있다. 물론 나 역시도 그렇다. 무관심이 상대적으로 더 큰 환호를 불러오는 셈이다. 우리 선수들은 대부분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해서 태어난 신세대들이다. 경기를 지켜보고 시상식에 박수를 보낸 뒤 나는 그들의 미니홈피를 검색해봤다. 메달을 딴 선수는 그 기쁨을, 메달을 놓친 선수는 그 아쉬움을 시시각각 기록해놓고 있었다. 그들은 어리고 어린 그들은 제가 할 수 있고 제가 잘할 줄 아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에 가식 없이 기뻐하고 체념 없이 승복할 줄 알았다. 주눅 모름과 구김살 없음이란 이름의 젊음, 나는 그것이 더없이 예쁘고 더없이 대견했으며 더없이 부러웠다.

그러나 그 마음 끝에 새로이 새기게 된 단어가 있었으니 이는 다름 아닌 슬픔이다. 슬픔을 몰랐냐고? 아니다. 슬픔이라는 단어가 언제 어디에 어떻게 놓여야 하는지 아주 잘 알게 되었다는 얘기다. “안 되려는 걸 하려니까 슬펐어요.” 올림픽에서 끝내 메달 획득에 실패하고 은퇴를 선언한 이규혁 선수의 말을 나는 두고두고 떠올렸다. 내게 슬픔이다 싶은 감정이 밀려올 때마다 그것이 엄살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안 된다는 것도 끝 간 데까지 해본 자만이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닌가.

내가 존경하는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페크가 그랬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달린다고.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인생의 러너가 아닌가. 비록 현역으로는 링크를 떠났지만 앞으로 이규혁 선수는 지도자로 더 많은 레이스에서 더 빛나는 러너로 역주를 펼칠 것이다. 그는 가슴 가득 꿈을 안고 달리는 진정한 러너를 경험한 바 있으니까. 이참에 나도 러너로 새로이 꿈 하나 꿔본다. 장딴지 굵은 아들 낳아 스케이터로 키우기. 야무지다고? 안 되면 말고!

김민정 시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체포 말고 구속” 윤석열 역제안의 이유 1.

“체포 말고 구속” 윤석열 역제안의 이유

트럼프처럼 복귀하겠다는 윤석열의 망상 2.

트럼프처럼 복귀하겠다는 윤석열의 망상

‘60cm 면도날 철조망’ 세운 경호처…윤석열 오늘은 체포될까 3.

‘60cm 면도날 철조망’ 세운 경호처…윤석열 오늘은 체포될까

[사설] 체포영장 거부하면서 구속영장 응한다는 윤의 궤변 4.

[사설] 체포영장 거부하면서 구속영장 응한다는 윤의 궤변

지리산에서…어제 만난 약초꾼, 오늘 만난 스님 5.

지리산에서…어제 만난 약초꾼, 오늘 만난 스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