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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송두율, 이 거대한 질문 / 우석훈

등록 2010-03-10 19:13수정 2010-03-10 23:17

우석훈 2.1연구소 소장
우석훈 2.1연구소 소장




1990년 그 어느날이라고 기억된다. 프랑스의 <르몽드>에 90년대에 마르크스의 자리를 이어갈 수 있는 학자에 대한 분석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다. 그들이 제시한 이름은 미셸 푸코, 존 롤스 그리고 위르겐 하버마스였다. 개인적인 편향이겠지만, 나는 감성적으로는 푸코를 좋아하고, 논리적으로는 롤스를 좋아한다. 정치적으로 따지자면 푸코는 좀더 좌파에, 롤스와 하버마스는 우파 혹은 보수주의자 정도로 자리를 주는 게 맞을 것 같다. 우리가 ‘소통’이라고 말하는 이 개념은 어쨌든 하버마스로부터 유행한 말이고, ‘공론장’이라는 개념 역시 그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의견을 모아가면서 한 사회가 파국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정말로 유럽식 지성인에 대한 믿음을 마지막으로 쥐고 있었던 사람이 하버마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버마스는 68의 대표적 학파인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막내이며 송두율은 그의 제자이다.

나에게 송두율은, 그가 북한에 갔거나 말거나, 간첩이거나 말거나, 내가 하버마스를 좋아하거나 말거나, 그런 철학적 흐름을 이해하고 있는 큰 스승이다. ‘경계인’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협소한 남북 상황에 너무 많은 것을 끼워넣으려고 한 것이 아니냐는 불만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사실 우리 모두의 의식 속에 분단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는 편향을 만들어낸 것도 사실이고, 그런 역사적 사실에서 자신만의 개념을 만든다는 것은 충분히 박수칠 만한 일이고 존경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송두율 귀국 사건은 한국에서 철학을 어떻게 대하고, 철학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혹은 시대의 지성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여준 사건이라는 게 내 기억에 남은 잔상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사건을 잊으려고 했거나 무의식으로 집어넣으려고 한 것 같고, 철학자 송두율을 자신의 일신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그야말로 ‘양아치급’으로 이해한 것 같다. ‘관리’라는 개념을 쓴다면 그는 자신의 일생을 잘 관리하지 못한 편인데, 솔직히 철학자가 정치인이나 연예인처럼 자신의 일신과 같은 것들을 너무 잘 챙긴다는 것도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홍형숙 감독의 <경계도시 2>는 이 송두율 사건을, 잊혀진 지 7년 만에 다시 우리 앞에 알몸으로 내놓는다. 그동안 정권도 바뀌고, 사회적 헤게모니가 완벽하게 보수주의자들에게 넘어갔다. 그동안 ‘종북주의자’ 논란으로 민주노동당의 분당이 있었고, 북한 인권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혹은 북한 체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를 둘러싸고 내부 격론이 일기도 했다. 외부에 자세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정당법에 의한 공당이 분당될 정도이니 어느 정도의 격론이었는지는 상상이 가능할 것 같다. ‘꼴보수’와 ‘친북 좌빨’이라는, 2002년부터 유효했던 이 정치 프레임에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벗어났는가, 그리고 계급적 정치성향을 다 뒤엎는 레드 콤플렉스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워졌는가, 이런 질문들이 다큐의 잔잔함과 함께 떠올랐다.

이 다큐는 우리에게 철학자는 어떤 존재인가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똑부러지는 것’을 찾는 레드 콤플렉스로 경직된 좌, 우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경계도시 2>는 오래간만에 보는 좋은 다큐이고, 한국 다큐의 가능성에 대해서 길을 제시하는 것 같다. 철학자가 철학을 하지 않는 사회, 그 속에서 예술이 철학보다 먼저 움직이는 것 같다. 송두율과 홍형숙 그리고 이 땅의 모든 배고픈 예술인들에게 나의 지지를 보내고 싶다.

우석훈 2.1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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