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라 경제부문 기자
털털거리는 고물차를 타고 백화점엘 갔다. 주차장 입구에 내리니 흐뭇하게 생긴 청년 주차요원이 웃으며 맞아준다. 이른바 ‘발레 파킹’ 서비스! 차 열쇠를 내주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매장으로 들어섰다. 이날의 쇼핑 미션은 침대커버 고르기였다. 처음 들른 매장에선 진드기 예방 기능에 대해 꼼꼼히 따져 물었다. 다음 집에선 그런 건 몽땅 까먹고, 목화솜 퀼트의 제작 과정에 대해 탐구했다. 다음엔 거위털 침구의 산지별 차이를 공부했고, 수입명품·극세사 매장 등을 지치도록 돌아다녔다. 마지막 집은 마이크로파이버 기능성 섬유의 세계였는데, 실크처럼 부드럽지만 면보다 빨리 마르고 통기성도 좋다는 최첨단 소재에 한참을 홀렸다. 그러나 어쩌랴. 다 좋은데 물방울 무늬가 어쩐지 촌스러워서 고개를 젓고 나와버렸다. 결국은 빈손으로 백화점을 나서는데, 주차요원이 차를 가져올 동안 대기실에서 기다리길 권했다. 커피믹스가 구비돼 있어 달달한 다방커피 한 잔을 마시는 사이 곧 차량이 준비됐다. 제복을 입은 여직원이 나와서 차 문을 열어주고 닫아주는데, 마지막엔 주차장 출구에 서 있다가, 우리 차가 빠져나가는 순간, 90도로 깍듯하게 인사하며 배웅까지 해주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유의 감정 서비스에 너무나도 익숙하다. 지갑을 손에 쥔 소비자로 존재하는 순간 차고 넘치는 친절에 둘러싸인다. 보편적 서비스가 이런 수준이니, 브이브이아이피 고객들이야 말해 무엇하랴. 쇼핑에 지친 발을 쉬도록 별도 휴식 라운지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쇼핑 나오시라고 고급 외제차도 집 앞까지 보내준다. ○백화점은 직원 구역에서 매장으로 걸어 나오는 곳에 인사 라인이 있다. 손님이 눈앞에 있든 없든 그 선 앞에 멈춰서서 90도로 인사를 한 뒤 걸어 나온다. 직원 구역 출구에는 ‘당신의 용모는 월드클래스 ○백화점에 맞습니까?’라고 묻는 문구가 새겨진 전신거울도 있는데, 나는 그 앞을 지날 때면 흠칫 옷매무새를 가다듬다가 오늘따라 월드클래스에 맞지 않는 용모에 좌절하곤 한다. △백화점도 감정 서비스는 마찬가지다. 이 백화점에는 요즘은 보기 드문 엘리베이터 안내원이 있다. 면세점 전용 엘리베이터 등에 배치된 제복차림의 여직원들은 층별 버튼도 눌러주고, 늘 상냥한 인사로 맞아주고 배웅한다. 그러니 소비자를 상대로 한 감정 서비스는 세계 어디서도 우리만한 곳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판매·접객사원들의 감정노동 강도 역시 세계적으로 낮은 수준이라고 보기 어렵다. 최근 국내에 연수를 온 롯데백화점 모스크바매장의 러시아 직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모회사의 고객맞춤형 마케팅 등에 감탄했지만, 몇몇 서비스 풍토에 대해서는 의아한 느낌을 표현했다. 문화적 차이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깍듯한 접객 인사 등에 대해서는 “인사를 하는 사람의 감정도 중요하다”고 말했고, 엘리베이터 안내원에 대해서도 그런 서비스가 왜 필요한지 갸우뚱한 표정을 지었다.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소비자 후생이 다른 가치를 지나치게 압도하는 사회에서 산다. 소비자 편의나 친절 서비스를 이유로 연중무휴, 심야 영업도 하고, 온종일 서서 접객도 하고, 음식점에선 무릎 꿇고 주문을 받기도 한다. 꼭 필요해서라기보다 고객이 칼자루를 쥔 ‘갑’의 위치라는 걸 상호 확인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한 감정 서비스도 허다하다.
그러나 우리는 매 순간 소비자로 존재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기에, 소비자가 아닌 순간들의 힘겨움과 불합리를 감수해야 한다. 지갑을 열 때만 ‘갑’일 수 있는 사회는 피로하다. 정세라 경제부문 기자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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