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길을 건너려고 건널목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길 맞은편에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문득 전자발찌가 생각났다. 맞은편에는 십수명의 남성들이 있었다. 얼굴 생김새나 머리 모양, 옷차림이 제각각인 사람들. 저 남성들 중 누군가 바지 안쪽에 전자발찌를 차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내게 어떤 의미인지 머릿속이 바빠졌다. 전자발찌로 나는 안전해지는가. 내가 살아가는 동안 ‘사건’이 됨직한 성폭력을 당할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형사처벌이 될 리 없는 일상에서의 숱한 성폭력은 일단 차치하자. 성폭력을 당한다면, 그리고 다행히도 살아있다면 나는 분명히 ‘그 새끼’를 잡아내서 처벌하고 싶을 테고, 정말 제대로 반성하고 사과할 때까지 용서하지도 않을 것이고 설령 용서하더라도 다시 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피해자로 드러내고 그 과정을 감당할 용기가 없어 신고조차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 때 몇몇 친구들은 나를 지지하고 격려하면서 도움을 줄 것이다. 조금씩 정신을 차린 나는 10%에 못 미친다는 신고율을 높이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해자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70~85%라, 피고소인을 지목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인 경우에는, 경찰이 어떻게든 그 가해자를 찾아내야 한다. 경찰의 열정을 믿는 수밖에 없겠으나 30대 중반 여성의 성폭력 신고에 경찰이 얼마나 성의를 보일지는 모르겠다. 고소인 조사하는 동안 괴롭히지만 않아도 고마운 세상이다. 강간의 동종 재범률은 전체 범죄의 그것보다 낮지만 14% 정도는 된다고 하니, 혹시라도 전자발찌를 착용한 사람들이 사건 발생 시각 어느 장소에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요긴한 정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잡히기만 한다면야, 전자발찌가 고맙기까지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의 이야기다. 내가 누구로부터도 성폭력을 당하지 않도록, 즉 사건을 예방하는 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때 문득, 나와 같은 편에 서 있던 사람들을 둘러보게 되었다. 역시나 십수명의 남성들이 있었다. 내가 맞은편의 남성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때, 왠지 나와 같은 시선으로 맞은편 남성들을 바라볼 것만 같다고 느껴졌던 이들이 다르게 보였다. 내가 불안해하는 동안, 이들은 ‘난 아니야’ 하며 안도하고 있는 것 아닐까. 전자발찌로 안전해지는 것은 전자발찌를 차지 않은 모든 남성들이다. 돈이든 사회적 지위든 관계든 여성이 신고할 수 없도록 할 ‘능력’이 있는 남성들, 여성은 남성의 성적 대상일 뿐이라는 오래된 훈육과 관습에 세뇌되어 과감해지는 남성들, ‘흉악범’의 얼굴과 옷차림과 성격을 갖지 않은 남성들, 그들은 전자발찌를 차지 않음으로써 안도감을 느낀다. 그리고 나에게 남은 것은 불안일 뿐이었다. 나는 전자발찌가 적절한 목표 아래, 적절한 절차를 거쳐, 적절한 방식으로, 사용될 수도 있는 기술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자발찌 소급적용 입법, 보호감호 망령의 부활, 사형 적극 집행 주장 등으로 누군가 지목당하고 누군가 배제되고 있는 요즘, 나는 안전해지기는커녕 불안으로 영혼을 잠식당하고 있다. 내가 속상한 것은 이것이다. 나는 왜 건널목 앞에서 문득 전자발찌 생각을 해야 했나. 원통하게 죽은 이들을 애도할 시간도 부족한데, 다시는 이런 죽음과 성폭력 사건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내 편일 언니들과 바삐 움직일 시간도 부족한데, 왜 나는 내 편인 척하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우르르 빠져나가는 걸 보며 길도 못 건너야 했나.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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