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지적장애 아이들이 생활하는 시설을 한 달에 한 번 방문했던 적이 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동아리에서 한 ‘봉사’활동이었다. 지적장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채로 빨래를 개키거나 공놀이를 함께 하거나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다 왔다. 그저 웃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얼굴들을 고마움과 반가움의 표시라고 쉽게 해석해 버리면서도 헛헛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돌아보면 그때 나는 ‘봉사’를 하러 간다고 생각했지만 ‘구경’만 하다 온 셈이었다. 그들이 왜 나처럼 ‘집’에서 살지 않고 거기서 살아야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들은 장애인이었으니까. 1997년 미국에서는 정신장애가 있는 여성 두 명이 조지아 주를 상대로 소를 제기한 사건이 있었다. 자신들이 격리된 환경에 감금되어 있는 것이 부당하다며 지역사회 기반의 프로그램을 통한 치료를 청구했다. 미국 장애인법은 장애를 이유로 사회 참여나 혜택에서 제외되는 것을 차별로 보고 “장애인들의 필요에 적합한 가장 통합된 환경에서의 프로그램을 시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1999년 미 연방대법원은 불필요한 시설 수용이 본질적 차별이며 재정 부족을 이유로 정당화될 수 없으므로 국가가 지역사회 중심의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이 옴스테드 판결로, 두 여성은 집을 포함해 자립생활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받게 되었다. 몇 해 전 각종 인권침해 제보가 들어온 한 시설에 조사를 나간 적이 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맞았어요”라며 억울함과 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하던 한 장애인은, 그러나 시설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시설 ‘밖’은 시설로 들어오면서 서서히 지워져 버렸고 차별의 한 형태인 고립과 격리는 익숙한 삶이 되어버린 것이다. 2004년 영국 대법원은, 난민이 도착 즉시 망명을 신청하지 않으면 사회보장을 청구할 권리를 박탈하는 정부 방침이 ‘비인도적이거나 잔인하고 모욕적인 처우 또는 처벌을 받지 않을 권리’를 침해한다고 판결했으며 소송 당사자들의 곤궁한 처지에 국가의 책임이 있다고 인정했다. 몸뚱이 하나 이끌고 시설을 나와 스스로 자립의 조건을 만들기 전에는 아무런 서비스도 제공받을 수 없는 한국의 제도 역시 다르지 않다. 지난해 12월 세 명의 장애인이 사회복지서비스 변경신청을 했다. 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서 자립생활을 할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신청인들이 다른 서비스와 더불어 지역사회에서 거주할 집을 요청한 것은, 인권이 고개만 끄덕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을 움직여야 하는 것이라는 데 따르는 당연한 요청이다. 인도 대법원은, 어떤 사회에서든 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권리는 자신을 계발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진 일정한 거처를 요구하며, 그것은 “인간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적으로, 영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누릴 수 있는 보금자리”라고 선언했다. 국가가 ‘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조처를 취하지 않는다면 인권을 보호하지 않으려는 행동을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신청을 접수한 음성군은 다양한 제도에 대한 안내만을 반복하며 사실상 변경신청을 거부했다. 신청인들은 음성군의 거부처분에 대한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소송 소장을 지난주 청주법원에 냈다. 이제 공은 사법부로 넘어갔다. “어려운 꿈이지만 저도 꿈을 갖고 싶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사람처럼 인정받고 대접받으며 살고 싶어요.” 이렇게 말하는 신청인의 요청에 사법부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고개만 끄덕이는 것이 아니라 시설 거주 장애인들이 빼앗긴 시설 ‘밖’을 돌려줄 판결을 기대한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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