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시인
<늘 푸른 인생>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 ‘고향 어르신들의 세월 나들이’라는 부제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 우리네 시골마을을 찾아가 그곳을 소개하고 토박이 어르신들의 살아온 얘기를 들어보는 식이다. 구성이라야 아주 간단하다. 길게는 70년 이상, 짧게는 40년 가까이 해로해온 노부부들이 주연급으로 등장하여 진행자 뽀빠이 이상용 아저씨가 이렇게 살아오셨다면서요? 하고 물으면 그렇게 살아왔지! 하고 그 세월의 내력을 좔좔 답해주는 거다. 구순 시아버지가 칠순 며느리에게 여직 아침저녁 밥상을 받을 만큼 장수의 시골마을에서 얘기는 보통 일제강점기에서 6·25를 거쳐 보릿고개 정도를 넘겨야 시작됐구나 할 정도로 거스름이 깊다. 주 타깃이 되는 실버세대도 아니면서 내가 일요일 오전 6시 알람을 맞춰 가면서까지 평일에 못 본 이 방송의 재방송을 챙기는 이유가 있다면 이는 필시 이들의 사연이 말이 되는 까닭일 테다. 한 할아버지가 운다. 너무도 가난해서 마당에 가마니를 깔고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었던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직접 자른 태를 아궁이에 태워가며 미역국 두 그릇을 끓이는 일이었다고 평생 미안하다며 운다. 한 할머니가 웃는다. 지긋지긋한 가난에 찬 데서 아이를 낳는 설움을 겪었지만 일곱 살 많은 할아버지가 장에 갈 때마다 예쁜 색시 누가 채갈까 감시하듯 뒤에서 졸졸 따라다닌다고 평생 사랑받는다며 웃는다. 눈물에 억지가 없고 웃음에 강요가 만무할 때 어딘가 먹먹해지면서 어딘가 먼 데를 훌쩍 바라보게 되는 순간, 내 시선이 가닿는 곳은 아마도 인생이란 설명 불가의 말 언저리리라. 다시 태어나도 지금처럼 함께 사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다시 태어나도 지금처럼 함께 살아야지!라고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답한다. 안다고 무시하고 살아봤다고 내버리면 죄지 죄. 백년해로, 그거 약속이잖아. 우리가 무슨 재주로 그걸 깨냐고. 안 그래? 충북이라는 지역, 그중에서 제천이라는 도시가 어디 붙어 있는지 가본 적 없으므로 알 길 없는 나는 충북 제천시 송학면 입석2리가 옥수수와 사과의 산지임을 소개하는 방송을 보고 그제야 인터넷에 들어가 검색을 한번 해봤다. 내 집 마당도 못 쓸면서 남의 마당 쓸 궁리에 앞섰다는 부끄러움이 들었던 건 몇 년 전 다녀왔던 스페인 여행이 문득 생각나서였다.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도 아닌 남부의 한 작은 동네에 백 년도 더 된 술집이다 밥집이다 카페다 자리하고 있다는 책자를 읽고 발이 부르트도록 찾아다닌 끝에 맥주를 마시고 파에야를 먹으며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던 내가 아니었던가. 얼마 전 ‘론리 플래닛’이 선정한 최악의 도시 3위로 서울이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어쩌다가보다는 당연하지라는 체념부터 앞섰다. 도대체가 어떤 추억이든 그것이 고일 여지라는 걸 허하지 않는 곳이 바로 서울이 아닌가 해서다. 집이 좀 낡고 오래되면 어떠랴. 역사가 바로 그러한걸. 사람이 좀 늙고 냄새나면 어떠랴. 자연이 바로 그러한걸. 하루도 빠짐없이 끼니마다 막걸리를 마셔온 할아버지를 말리기는커녕 술을 담가주기 바빴다는 한 할머니가 말했다. 그걸 내버려둬야지 어쩌겠어, 그래도 속 편하니 저리 말짱한데. 실로 강, 강, 강 때문에 우울한 요즘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애국자가 되어가는 기분이다. 애국이 뭐 별거인가, 나보다 내 후손들이 어찌 살까 훗날을 걱정한다면 그게 열혈이지. 렛 잇 비(Let it be), 할머니 말마따나 그러니까 제발이지 가만 좀 내버려두면 안 될까.
어쨌거나 말 나온 김에 우리 강산 푸르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강산 뻔질나게 캠페인이라도 벌여봐야겠다는 결심이 선다.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신흥리, 일단 내 선산부터 알고 보자는 심보다.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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