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 교육평론가
고등학교(이하 고등학교는 일반 인문계 고교)는 대학입시를 전문적으로 준비해줘야 하는가, 아니면 대학입시와 무관하게 이른바 ‘정상적 교육과정’을 운영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상’은 정상적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것이지만, ‘현실’은 학교에서 대학입시 준비를 해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문제를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인식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장애물이다. 이것은 이상과 현실의 문제라기보다, 고교 교육과 대학입시를 관계짓는 두 가지 모델 중 무엇을 택할 것인지의 문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첫째 모델은 주로 유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국, 독일, 프랑스의 대학입시는 국가 또는 공인기관이 주관하는 서술형·논술형 시험으로서, 지망하는 전공별로 시험과목이 분화되어 지정되고, 고등학교에서 전문적으로 이 시험을 준비해준다는 세 가지 공통점을 가진다. 이 나라들에서 고등학교는 전문적인 입시 준비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기꺼이 수행한다. 둘째 모델의 대표적 사례는 미국이다. 미국의 고등학교에서는 내일 대학입시(SAT)를 봐도 결코 정규수업 시간에 에스에이티 문제집을 풀지 않고 ‘정상 수업’을 한다. 어차피 에스에이티가 1년 중 7회나 치러지고 어느 과목을 언제 치를지 학생들마다 제각기 전략이 다르기 때문에, 학교에서 장단을 맞추기가 불가능하다. 내신성적은 에스에이티에 필적하는 비중으로 반영되는데, 객관식인 에스에이티와 달리 내신 시험문제는 주로 논술형이다. 우리나라 고등학교는? 유럽식과 미국식의 잡탕이다. 최대한 잽싸게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마친 뒤, 수능문제집을 달달달 푼다. 아무도 만족시킬 수 없는, 그야말로 비효율의 극치다. 유럽처럼 고등학교를 전문적인 대학입시 준비기관으로 만들든가, 미국처럼 대학입시와 무관하게 ‘정상수업’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나는 유럽식을 지지한다. 수능을 논술형 대학입학 국가고시로 대체하고, 공통필수과목(‘국영수’)을 없애거나 극소화하고 대학 전공별로 다양한 시험과목들을 지정하며, 고등학교는 과목 수를 대폭 줄이고 전문적으로 대학입시를 준비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유럽식이 아닌 미국식으로 간다 할지라도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이라고 본다. 미국식으로 가려면 수능을 연 4회 이상 실시하고 에스에이티처럼 문제은행 방식으로 표준화하여 시험성적을 2~3년간 써먹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미국식 모델에서는 학교에서 수능문제집을 전문적으로 풀어주지 않으므로 사교육이 팽창할 우려가 있지만, 우리에겐 ‘이비에스(EBS·교육방송) 강의’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 지나치게 많은 현재의 이비에스 교재·강의를 감축하면서 수능 반영률을 100%로 하면, 수능 사교육을 상당 수준 제어할 수 있다. 대학입시 없이 내신성적으로 선발하는 캐나다·스웨덴 모델을 도입하면 어떨까? 현행 상대평가 내신을 유지한다면 교실이 전쟁터가 될 것이고, 고교등급제 논란에서 헤어날 방법이 없다. 다른 나라들처럼 내신성적을 절대평가로 전환한다면? 온정주의가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절대평가가 ‘내신성적 부풀리기’로 비화하는 것을 막을 방도가 막연하다. 차라리 대학입시를 인정하되 유럽식과 미국식 중 한쪽으로 확실히 개혁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다. 현행 대학입시의 부정적 효과 때문에 대학입시 일반을 거부하는 것은 ‘운동권’으로서는 허용될지 몰라도, 집권을 노리는 현실적 세력으로서는 곤란한 태도이다. 조전혁 의원을 저주하는 방식으로는 제2의 조전혁 사태를 막을 수 없다. 실행 가능한 정책에 대한 적극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주도권을 회복하지 않으면, 진보가 더는 진보할 수 없다. 진보여, 대학입시를 허하라.
이범 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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