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 2.1연구소 소장
한국에서 정치를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같아 보인다. 국민들은 정치에 대해 불신을 넘어서 혐오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렇다고 한국 국민들이 정말로 정치에 대해서 무관심한가라고 물으면, 어쩌면 ‘정치 과잉’이라고 할 정도로 민감한 대답이 나오기도 한다. 이번 지방선거는 ‘심심한 정치’ 혹은 ‘뻔한 정치’의 대표적인 사례로 정치사에 남을 듯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역사의 전환점이 되기에는 너무 밍밍하게 지나가는 것 같다. 다소 식상한 비유지만, 영화 <적벽대전>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동남풍을 위해서 기도를 드렸던 제갈량처럼, 민주당이 바라는 모든 것이 5월23일에 맞추어져 있는 듯하다. 분명히 과학적인 접근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죽은 대통령’과 ‘산 대통령’으로 구도를 만드는 것이 미래지향적인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사람 사는 일은 모른다. 적벽대전에서 진짜로 동남풍이 불지, 제갈량 말고는 누가 알았겠는가? 이 와중에서 민주당이 잃어버린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대의명분이다. 민주당에 표를 몰아주고 싶지만,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하여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같은 질문들이 남는다. 경선 ‘판때기’에도 제대로 못 올라가 본 이계안이나 진보신당의 후보들은 진짜 가난한 흥부 처지인데, 이들의 눈으로 보면 민주당 역시 쌀 한 말 안 빌려주는 놀부인 셈이다. 흥부들의 한 표 한 표, 지지세 하나하나 모아서 주고는 싶은데, 왜 놀부한테 몰아주어야 할지, 도대체 그 명분이 보이질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무엇보다도 명분 싸움인데, 한국 정치 특유의 지역구도와 레드콤플렉스 외에는 명분이 서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과연 민주당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다음 판을 위해서라도 진지하게 한번 고민을 해보고 싶다. ‘진보’라고 표현을 하면 맞을까? 우리말로는 똑같이 진보라고 표현하지만, ‘리버럴’이라는 단어가 있고, ‘프로그레시브’라는 단어가 있다. 같은 진보라는 단어를 공유하지만, 민주당의 진보는 리버럴의 의미이고, 진보신당의 진보는 프로그레시브라는 의미다. 대체적으로 한국 국민의 30%는 진보라고 답변을 하지만, “좌파인가?”라고 물으면 2~3% 정도가 답변을 한다. 리버럴이 프로그레시브에게 “힘을 합치자”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절차와 논의가 필요한데, 이게 전부 생략되어 있다. “우리는 이명박이 싫어요”라는 문장 한 가지만 제시되어 있다. 유럽식으로 보면 민주당은 중도우파 정도 된다고 할 수 있다. 한나라당은 그보다는 우측, 즉 정통 우파에서 극우파까지 혼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프랑스의 사회당이 야당이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우리는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에서 오른쪽에서만 여당과 야당이 형성된 셈이다. 이 분단 특수성을 묘하게 봉합시킨 게 진보/보수라는 프레임이었다. 두번에 걸친 집권 과정에 이 프레임은 유효했다. 그러나 앞으로도 유효할까? 만약에 이번 선거에서 수도권 주요 선거에서 민주당이 모두 패한다면, 민주당은 호남 자민련처럼 과거의 정당이 될지도 모른다. 이럴 가능성은 농후하지만, 이건 꼭 민주당이 이번 선거에서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진보라는 과거의 틀이 역사 속에서 유효성을 이미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민주당의 진보는 리버럴인가, 프로그레시브인가, 이 질문에 답해주시기 바란다. 리버럴을 ‘진보’로 얘기하던 그 질문의 시효가 이제 끝나가는 것 아닌가? 좌파가 자신을 좌파라고 말하지 못하던 그 시기도, 이번 천안함 사태로 역사적 시효가 종료해가는 레드콤플렉스 시대의 종료와 함께 끝나는 것 아닌가?
우석훈 2.1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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