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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선택적 기억상실 / 김종구

등록 2010-05-13 18:16수정 2010-05-13 21:04

김종구 논설위원
김종구 논설위원




지난주 미국 <에이비시>(ABC) 방송은 ‘모든 것을 잊은 남자’라는 제목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남자의 기구한 사연을 전했다. 미국 피닉스에 사는 스콧 볼잰(47)은 16개월 전 회사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뒷머리를 바닥에 부딪힌 뒤 예전의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렸다. 친척과 자식들은 물론 25년 넘게 살아온 아내마저도 이제는 낯선 타인일 뿐이다. “마치 누가 내 인생 컴퓨터의 삭제 키를 눌러 메모리가 통째로 날아간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기억상실증은 크게 ‘전향성 기억상실’(anterograde amnesia)과 ‘후향성 기억상실’(retrograde amnesia)로 나뉜다. 새로운 정보나 사실을 습득하는 능력이 손상돼 몇 초나 몇 분이 지나면 곧바로 잊어버리는 것이 전자라면, 일정 시점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후자다.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의 복수극을 그린 <메멘토> 같은 영화도 있지만, <마음의 행로> <겨울연가> 등 영화와 드라마에서 주로 소재로 삼는 기억상실증은 후자다. 기억상실증의 종류나 유형 중에는 ‘선택적 기억상실’(selective amnesia)이라는 것도 있다. 어느 시점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을 중심으로 그 주변 시간대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경우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2년 전 촛불의 기억’을 둘러싼 논란이 치열하다. 그 기억은 때로는 왜곡되고, 과장되며, 중요한 대목이 잊히는 경우도 많다. 자신이 처한 입장에 따른 선택적 기억상실 증후군도 엿보인다. 당시 뼈저린 반성을 다짐했던 이명박 대통령이 이제 와서 국민들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것도 일종의 선택적 기억상실이라 할 만하다. “기억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해두는 대뇌 활동이 아니라 매 순간 변하는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경험의 질료”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요즘이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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