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시인
동생의 일본인 친구가 집에 놀러온 적이 있다. 동생처럼 그 역시 승무원이었는데 휴가를 맞아 서울이 아닌 한국을 체험하고 싶다고 해 인천에 며칠 머물게 된 것이었다. 외국인의 첫 방문에 흥분한 엄마는 토종이다 싶은 음식으로만 식단을 짰고, 막상 식탁에 앉은 그들이 얘기를 잇자 슬그머니 안방으로 숨어들었다. 동생과 그녀가 영어로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말했다. 언니, 오늘 마유미 데리고 백화점에 가줄래? 백화점에 도착하자 마유미의 입에서 늘이는 대로 늘어지는 긴 엿처럼 문장들이 이어져 나왔다. 나는 웃었으나 그 웃음이 썼던 모양이었다. 눈치 빠른 마유미가 긴 엿 같은 문장들을 엿장수처럼 탁탁 끊어 짤막한 가락엿으로 내게 내밀었다. 한국 여자들은 어떻게 하나같이 피부가 다 하얗고 고울 수 있죠? 메이크업! 나의 대답에 마유미가 박수를 치며 깔깔 웃어댔다. 한국의 물은 일본과 달라서 뼈를 튼튼하게 한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다들 콧날이 오뚝한 건가요? 플라스틱! 내 대답에 마유미가 친한 척 내 팔짱을 꼈다. 나는 마유미의 코를 쳐다봤다. 오리지널? 나의 질문에 당황한 듯 마유미의 양 볼이 후끈 달아올랐다. 수비가 아닌 공격의 묘미라니, 나는 처음으로 영어에 갈증을 느꼈다. 그러나 게으른 나는, 우리말도 잘 못하는 주제라며 자기합리화에 바빴던 나는, 영어 개인과외 선생을 구한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기억에서 아예 영어를 놓고 말았다. 그리고 지난주 아무런 준비 없이 한국문학번역원에서 주최하는 ‘세계작가축제’에 참석하게 되었다. 세계 곳곳에서 작가 12명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고 그들 중 몇몇은 선망했던 이들이라 내 설렘은 컸다. 바로 눈앞에서 그가 와인을 마시고 있고, 그녀가 뷔페 음식을 접시에 담고 있는데, 하이! 그들이 먼저 건네는 인사를 받자마자 나는 그 옛날의 엄마처럼 슬그머니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20년 가까이 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배운 그 꼬부랑 말은 대체 영어가 아니고 뭐였단 말인가. 나는 슬펐으나 그 슬픔이 짜증났던 모양이다. 함께 방을 쓴 선배 시인과 밤을 새워 한국말로 낮에 다하지 못한 수다를 떨어댔으니 말이다. 일정 중 하루는 전주 한옥마을에서 인도 출신 시인 비벡과 막걸리를 마셨다. 통역을 가운데 두고 술 몇 잔이 오가자 내게 어떤 용기 같은 것이 생겨났다. 번데기와 칡과 김치부침개와 청어가 안주로 나온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이른바 ‘시’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번역된 그의 시에 감탄했고 그는 번역된 나의 시를 궁금해했다. 메이비, 피피(Pippi)? 오, 예스! 말이 되든 아니 되든 상대에게 ‘들려주기’ 위한 영어가 아니라 내가 ‘하기’ 위한 영어를 바라게 된 마음, 정말이지 간절해지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낮에 명동의 한 인도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깨끗하게 다린 전통의상을 갖춰 입은 채 말없이 잔에 물을 따라주는 인도 남자를 보자 비벡에게 배운 말이 떠올랐다. 나안 우나익 카탈리케렌. 그러자 그가 깜짝 놀라며 안 그래도 쌍꺼풀 깊은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나는 너를 사랑해! 아, 그거 타밀어인데 어떻게 아셨어요? 그는 금방이라도 자지러질 것 같은 깨방정을 떨었다. 청년이 소년으로 분할 때의 아름다움은 이렇듯 부지불식간에 들키는 그리움 같은 데에 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알겠다. 외국어를 잘하는 비법 중에 외국인과 연애하기가 왜 단연 수위를 차지하는지. 그렇다면 문제는 사랑인가. 허나 봄날이 가고 있다. 꽃 다 지기 전 인도식당에나 한 번 더 다녀와야겠다. 옐로 달 커리 먹으러.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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