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영 인디고 유스 북페어 팀장
20∼30대 투표율 상승으로 인한 정치적 이변 속에서 우리 사회는 희망을 발견한다. 지난 6월2일에 투표권을 처음 행사한 나로서는 “투표 많이 해줘서 고맙고 기특하다”라는 칭찬처럼 들리는 이런 진단이 그리 달갑지 않다. 투표율 상승으로 인한 지방자치 권력구도의 재편에서 읽어내는 희망이란 다만 수치화된 매우 피상적인 희망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깨어 있는 시민으로서 자기의지를 투표로밖에 드러내지 못하는 것에서 갑갑함과 무력함이 느껴진다.
지난해 이맘쯤인 2009년 6월10일, ‘6월항쟁 계승·민주회복을 위한 범국민대회’에 참여했던 한 친구가 있다. 대학교 신입생이었던 그 친구는 6월항쟁을 기리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 행사에 ‘개인적’으로 참여했고, 우연히 선두대열에 서게 되는 바람(?)에 집시법과 일반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연행되어 44시간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다. 그 후로 그 친구는 경찰 조사와 법정 출석으로 매달 한번꼴로 수업을 빠져야만 했다. 검사가 벌금을 ‘주장’(구형이란 말은 쓰지 않겠다)했지만 당연히 무죄를 선고받았다. 문제는 그 이후다. 검찰이 항소하는 바람에 1년이 지나도록 그 친구는 법정 출석에서 자유롭지 못한 몸이다. 스무살 남짓한 친구의 ‘도로’ 한번 밟은 대가치고는 너무 혹독하다.
투표를 통한 정치적 의사표현이 힘겹게 성공했음에도 이 친구는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앞으로도 계속 진압당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 사회에서 젊은 세대들에게 촛불시위는 하나의 사건이었지만, 이제는 지나간 과거에 지나지 않을 운명에 처해 있다. 이 운명에 대한 저항을 위해 이 친구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한 표를 통해 ‘합법적’으로 이 정권을 심판하고자 했으나, 투표만으로는 해갈되지 않는 부분이 여전히 존재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존재라는 명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한국 사회는 과연 시민정치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가?
우리가 기꺼이 정치적인 주체로 참여해야 하는 까닭은 피할 수 없이 사회적으로 결정되고 합의된 사안으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도로를 잠시 밟은 스무살 청년에게 끈질기게 법의 심판을 가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결정’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선거로 끝낼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지만 부단히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독단의 결정을 불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양한 삶의 문제들을 수면 위로 올려 더 힘껏 부딪히게 해야 한다.
‘도로’를 밟게 한 참여적 시민의식 때문에 1년이 넘도록 검찰의 소환장을 발부받는 친구의 신세는 한국 젊은이들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정치란 개인의 차원에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공공의 영역을 창조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가장 해결능력이 없는 자들의 요구를 공론화할 수 있는 평등한 자유를 실현가능하게 하는 가치이다. 한 개인의 시간과 존엄을 빼앗고 심적·육체적 고통을 주는 부당함을 공론화할 수 있고, 그 공론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민주주의의 정치가 가능하다. 고통받는 개인들의 아픔을 등한시하는 민주주의에 어떤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정부는 오직 선거일에만 투표로‘만’ 말하라 한다. 이 자유를 빼고는 우리에게 남은 정치적 자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일상생활의 차원에서 우리는 정치적으로 사망한 존재가 아닌가? 투표는 일상정치의 자연스러운 귀결점이다. 6·2 지방선거는 끝났다. 그러나 이제부터 우리가 해결해야 할 일은 시작됐다. 일상정치의 실현은 어렵고도 멀지만, 우리는 아직 젊다.
이윤영 인디고 유스 북페어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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