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시인
어쩌다 낭독을 주로 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다. 짧은 시 한 편 찬찬히 읽고 내려오는 게 내 임무였는데 주어진 것이 하필이면 세네갈의 초대 대통령이기도 했던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의 시였다. 대통령이 시를 읽고 시를 쓰는 시인이라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방송을 본 아빠가 밤늦게 전화를 걸어왔다. 너 순식간에 지나가더라. 근데 아빠, 대통령이 취임 때나 현충일 같은 기념일에 길고 딱딱하고 어려운 연설문이 아니라 짧고 부드럽고 쉬운 시를 낭독한다면 그도 참 아름다운 일이겠어, 그치? 따지고 보자면 별말도 아니었는데 그 순간 아빠가 발끈 성을 내는 것이었다. 야, 대통령이 큰일 하느라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김삿갓이냐, 한가하게 시를 읽고 시나 쓰게.
나는 그만 물불 못 가리고 버럭 하고 말았다. 그로 부녀지간의 말다툼은 선거철과 맞물려 계속되었다. 부모자식간에 무슨 말싸움인가 하겠지만 창밖 유세차량에서 마이크 소리가 여럿 겹쳐 짜증을 불러일으킬수록 우리들도 그렇게 엉켜갔다. 밥을 먹다 숟가락을 내던지고 방문을 걸어잠근 채 나 굶어죽을 거야 하는 쪽이 아빠라면, 꾸역꾸역 아빠가 남긴 밥까지 꼭꼭 씹어 먹고 유유히 커피까지 내려 마시는 쪽이 나였다. 그럼 내가 승자인가. 아니다. 아빠는 뒤끝 작렬이라, 그러고 나면 꼭 드러눕는 것으로 나를 자책하고 가책받게 했으니까.
앞선 선거에서는 심장이더니 올해는 허리였다. 허리디스크 수술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도 꼭두새벽에 일어나 목욕하고 절뚝절뚝 투표를 하고 온 아빠는 늦잠에 빠진 나를 깨우지 않았다. 왜 안 깨웠어, 하마터면 못할 뻔했잖아. 허겁지겁 뒤늦게 투표를 마치고 온 내가 항의하듯 묻자 아빠가 말했다. 아깝다, 한 표라도 줄일 수 있었는데. 헉, 지금 장난해? 그러나 나는 안다, 아빠의 장난이 진심이었음을 말이다.
며칠 전 아빠의 생일상을 물리고 간만에 둘이 진지하게 마주앉았다. 세종시에, 4대강에, 천안함에, 예민한 정치적 사항들을 사이에 두고 나름 토론이란 것을 해보는데 얼마 안 가 우린 서로를 외계인이라 칭하고 있었다. 화성에서 온 딸은 화성의 말만 했다. 금성에서 온 아빠는 금성의 말만 했다. 그것이 차이이고 그것이 다름인데 결국은 이다, 아니다, 맞다, 틀리다, 서로에게 원색적인 비난의 표창을 마구 날리고 있었다. 우리가 누구 덕에 이만큼 안전하게 잘 먹고 잘살게 되었는지 네가 알아? 네가 전쟁을 아냐고!
누구 덕이라… 그 말에 느닷없이 눈물이 핑 돈 까닭은 왜일까. 나는 무너지고 꺾인 아빠의 허리를 쳐다봤다. 해방둥이로 태어나 일평생 일만 한 아빠 덕에 내가 이렇게 튼실하게 자랄 수 있었는데 우리네 아버지들은 이렇듯 애써 쌓은 은공을 애먼 사람에게 돌리는구나. 그들의 무한한 착함과 그 어떤 척도 하지 못하는 무한한 순정 앞에서 나는 한발 뒤로 조용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선거는 끝났다. 난생처음 개표방송을 보느라 밤을 새웠다. 시차가 반대되는 나라에서 치러지는 월드컵 본선에서 흥분 반 고래고래 반 생방송으로 우리나라를 응원하다 찌들어 해를 맞은 기분이었다. 눈이 따가웠다. 귀에서는 윙윙 매미 소리가 났다. 어디 가서 딱 한잠만 자고 나면 개운했을 텐데 회사에 출근하니 입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입을 모아 선거 운운하느라 바빴다. 그날 아침 내가 몹시 히스테릭했다면, 그로 후배들이 노처녀 팀장의 뒷담화를 깔 수밖에 없었다면 이해하시라, 아무리 내용이 알찼다 하더라도 경기는 이겨야 제맛이라는 승부욕의 소유자가 바로 나니까. 그런 의미로 이제는 바야흐로 혈압을 걱정해야 할 때다. 대, 한, 민, 국, 짝짝짝 짝짝, 진짜 월드컵이 시작이다.
김민정 시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