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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한아름 슈퍼, 다 어디로 갔나 / 김민정

등록 2010-06-30 20:43

김민정 시인
김민정 시인
어릴 적 수원에서 자취하던 막내이모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눈이 내리고 난 어느 추운 저녁이었다. 그저 이런 날씨엔 호호 불어 계란 푼 라면이나 한 그릇 먹었으면 좋겠다고 지나가는 말을 했을 뿐인데 이모가 벌떡 일어나 거실 창문을 드르륵 열었다. 그러고는 맞은편 상가에 자리한 슈퍼 아저씨를 큰 소리로 불렀다. 아저씨, 돈 내일 드릴 테니까 라면 좀 올려주세요. 처음이 아니라는 듯 아저씨는 능숙한 솜씨로 2층 이모의 창을 향해 두 개의 라면을 하나하나 던져 올렸고 이모는 능란한 솜씨로 1층 아저씨가 던져주는 라면 두 개를 차분차분 받아안았다. 때마침 한아름 슈퍼라는 간판에 불이 환하게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아파트로 이사하기 전까지 우리 집 단골 시장 역시 한아름 슈퍼라는 간판을 단 작은 구멍가게였다. 그것도 일종의 유행이었을까. 부흥쌀집이나 풍년상회처럼 슈퍼 하면 한아름이라는 풍성함의 뉘앙스를 달던 게 말이다. 가겟집 아줌마는 누가 누구네 아이인지 다 알았다. 그래서 외상을 달아도 부끄럽지 않았고 소풍날 아침 껌을 살 때면 콜라나 사이다도 덤으로 얻어 마실 수 있었다. 역으로 가겟집 아줌마네 아들이 고등학교에 갈 때는 이집 저집 사전을 사다 안겼고 그가 몰래 숨어 담배를 피우면 이집 저집 어른들이 누구나 따끔하게 혼을 냈다. 친척보다 더 자주 보고 사는 이들이 가겟집 식구들이었다. 동네 엄마들은 늘 그곳에서 콩나물이며 두부며 고등어 등의 찬거리를 함께 사며 친목계를 결성하기에 이르렀고, 동네 아빠들은 퇴근길 파라솔 아래 맥주에 마른멸치를 곁들이며 서로의 집안 대소사를 챙기는 친목계를 두텁게 다져나갔다.

일산에 이사를 왔을 때 입주가 다 끝나지 않은 아파트여서인지 군데군데 상가가 빈 채였다. 그럼에도 아파트 맞은편 건물에는 저마다 간판을 달리한 슈퍼 세 곳이 나란히 붙어 장사에 열혈이었다. 어느 날 아파트 후문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던 한 아저씨를 만났다. 5단지 한아름 슈퍼, 가격에 상관없이 무엇이든 배달해드립니다, 피는 못 속인다고, 게으른 이모의 조카인 나는 그 후 뻔질나게 전화를 해댔다. 아저씨 달지 않은 하드로 아무거나 골라서 다섯개요, 아저씨 세제인데 친환경으로 가격 상관없이요, 아저씨 상주참외로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고 절대 안 곯은 걸로요. 그때마다 아저씨는 무좀양말에 슬리퍼를 신은 발로 작은 봉지 몇 개 든 채 현관 앞에 서 있곤 했다.

슈퍼 세 곳 중 두 곳에 ‘세 놉니다’라는 삐뚤빼뚤 글씨가 붙은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파트 정문 앞에 대형 마트의 분점인 체인 슈퍼가 들어선 것이다. 개업 기념으로 장바구니용 기저귀가방에, 카드를 만들면 포인트도 두 배로 적립해준다는 광고에 귀가 솔깃해져, 매일같이 과한 할인율로 유혹하는 참치며 치약이며 과자봉지를 사서 수납장마다 켜켜이 쌓아두기 바빴다. 혼자 사는 살림에 금방 전쟁이 날 것도 아닌데 대체 왜 그렇게 뭔가 사들이지 못해 안달이었는지.

오래지 않아 5단지 한아름 슈퍼마저 문을 닫았다. 유리창에 얼룩덜룩 미처 다 떼지 못한 스티커 자국 같은 쓸쓸함도 조금씩 잊혀갈 무렵 새로이 간판이 걸렸다. 어쩌구저쩌구 닭집, 먼저 있던 세 군데 슈퍼를 다 터서 만든, 탁자가 족히 열은 넘어 뵈는 초대형 가게였다. 개업과 동시에 월드컵이라는 호재를 만난 복으로 닭집 오토바이는 쉴 새 없이 빵빵 소리를 내며 아파트 안팎을 내달렸다. 따르릉따르릉 자전거를 타고 가다 만날 때면 머리 숙여 인사하던 슈퍼 아저씨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먹고사시려나. 모아놓은 영수증 가져오면 그거 합산한 금액의 10퍼센트만큼 주전부리 골라가라 했는데 말도 없이 줄행랑을 치셨으니, 잊지 마시라 빚은 내가 아니라 아저씨가 진 거다, 흥!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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