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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빨간 사과의 맛 / 김민정

등록 2010-07-21 20:19수정 2010-07-22 14:47

김민정 시인
김민정 시인
상식밖의 발언…저 사람 제 정신이야?
강용석 의원에게 딸이 있다면 과연 참았을까
지하철을 타고 여동생과 인천 집에서 서울 직장까지 함께 출근하던 때가 있었다. 동생의 키는 175센티미터에 가까워 웬만한 남자들과 거의 눈높이가 맞았다. 타본 사람들은 너무도 잘 알겠지만 지하철 1호선은 그야말로 지옥철이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람과 사람이 비벼져 내는 아비규환의 소리들로 더한 혼잡을 이루곤 했다. 그날도 예외가 없이 바싹 옆에 붙어 선 사람의 입 냄새에 거의 기절 직전이었는데 난데없이 버럭 동생이 성을 내는 것이었다. 누구야? 어떤 새끼야? 이 손 안 치워?

일순 깊고 묵직한 정적이 흐르면서 열차의 덜컹거리는 소리만이 볼륨을 키워갔다. 빡빡한 사람들 틈에 서 있던 동생 주변에서 사람들이 어디서 여유가 났는지 뒤로 슬쩍 물러나는 것도 같았다. 아주 걸리기만 해봐, 개망신 제대로 한번 줄 테니까. 씩씩거리는 동생의 등을 다독이며 나는 왜, 왜, 입 모양을 둥글게 모으면서 물었다. 자꾸 엉덩이를 만지잖아. 이럴 땐 있지, 욕지거리를 해줘야 잠잠해져 언니. 일찌감치 키가 웃자랐던 동생이 잦은 경험 끝에 얻어낸 나름의 방안임이 분명했다.

그로부터 나도 종종 그런 일을 겪었다. 물론 입 밖으로 욕을 내뱉지는 않았다. 대신 펜대에 펜촉을 꽂아 핸드백 앞주머니에 넣어 다니고는 했다. 더는 1호선 열차를 타지 않게 되면서 펜촉이 꽂힌 펜대 역시 버려지고 잊혔지만 세상에는 몸보다 더 무시무시한 말이란 녀석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펜촉에 꽂힌 펜대 따위는 한입 거리도 안 되게 꺾어 죽일 수 있는 말, 그 말.

하루는 술에 취한 한 선생이 다짜고짜 성적인 욕설을 해왔다. 물론 내 시를 근거로 삼은 비난이었다. 참아서 참아지는 일이면 참으려고 했다. 그러나 밤을 꼴딱 지새우고 동이 터오는 순간까지 나는 꼼짝 않고 앉아 휴대전화만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내게 뱉은 욕설 그대로를 그에게 전했다. 그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곧 내게 진심을 다해 사과했다.

아니라고 하니까 아닐 수도 있겠지만 강용석 의원의 이번 사태를 보면서 내가 보인 첫 번째 반응은 헛웃음이었다. 저 사람 제정신이야? 미친 거 아니야? 정치인에 별 관심이 없었으므로 처음 알게 된 그의 이름이 검색어 1위에 오른 걸 보면서 거꾸로 클릭을 해 그를 좇아 나갔다. 함께 일하는 후배들이 말했다. 선생님 프로필 사진은 멀쩡한데요. 그러다 코미디보다 더 웃긴 글도 하나 발견했다. 웁스! 박근혜 의원은 이렇게 사람을 우습게 만드는 글을 보고도 왜 정식으로 항의하고 삭제를 요청하지 않았을까. 아니라고 하니까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에게 역지사지를 한번 써보라고 시키고 싶은 마음이다. 만약 그에게 딸이 있고 그 딸이 밖에 나가 한 정치인으로부터 그런 맥락의 얘기를 들었을 때 그는 과연 참았겠느냐고. 아니라고 하니까 아닐 수도 있겠지만 타고난 장기임이 분명한 법적 대응이란 방식으로 그는 진즉 이른 대처에 나섰을 것이다.

상식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기본으로 알고 산다. 풀자면 아주 쉽다. 사람들이 보통 알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 일반적 견문과 함께 이해력, 판단력, 사리 분별 따위가 포함된다, 정도의 사전적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니까. 살면서 욕 안 먹고 사는 사람 어디 있으랴. 그러나 나는 일련의 어떤 쌍욕보다 너 정말 상식 밖이야,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더 큰 상처를 입는 것 같다. 이유는 간단하다.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볼 빨개지는 아이가 되곤 하는 까닭이다. 빨간 얼굴을 제빛으로 돌리기 위한 가장 빠른 색칠 공부는 발 빠른 인정일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빨간 사과의 빛은 검게 변하고 그 속은 곪는다. 나는 잘 익은 빨간 사과를 맛보고 싶을 뿐이다.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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