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요 몇년 새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요약하면, 돈이 사람들의 정신을 장악하면서 ‘돈 안 되는’ 학문인 인문학이 괄시받는다는 것일 게다. 사실 이제 누구도 대학에서 철학이나 문학을 공부하겠다는 아이를 곱게 바라보진 않는다. 하여튼 그런 위기론 속에 ‘비제도’ 영역에선 인문학 공부가 나름의 붐을 이룬다. 여기저기서 인문학 강좌가 열리고 나 역시 그런 데 불려가는 일이 전보다 잦다. 사람들은 그런저런 강좌를 꾸리고 참여하면서 자신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응하고 있다는 지적 만족감을 얻는 것도 같다.
요즘 같은 세상에 돈 아닌 다른 걸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귀한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런 귀한 노력들 속에서도 정작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리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가장 간명하게 정의한다면 인문학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공부’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인문학을 여느 학문과 다르게 여기는 것도, 그 위기를 개탄하는 이유도 인문학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인문학 공부는 인문학 책을 읽는 일, 인문학적 개념과 지식을 습득하는 일만은 아니다. 물론 책을 읽고 개념과 지식을 습득하는 일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중요한 방법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문학 공부의 요체는 끊임없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삶에 있다. 인문학 책을 여러 권 썼지만 ‘인간이란 무엇인가’엔 영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있고, 인문학적 지식은 보잘것없지만 언제나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로 이어진다. 그리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회란 무엇인가? 교육이란 무엇인가? 등 인간의 삶과 관련한 모든 부문으로 끝없이 이어진다. 그 질문들은 다시 잔가지를 뻗어나간다. 이를테면 ‘교육이란 무엇인가?’는 아이는 왜 공부를 하는가, 학교는 무엇인가, 국어 공부는 무엇인가, 수학은 왜 공부하는가 등으로 이어진다. 그 질문들에 정직하게 대답하는 것, 다시 말해서 내 삶에 실천하는 것을 인문정신이라 한다. 진정한 인문학 공부는 인문정신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시작된다.
인문정신은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하며 완전히 해방된 삶을 살게 한다. 그러나 인문정신을 갖는 일은 인문학 책을 읽거나 말이나 글에 난해한 인문학적 개념어를 섞는 일처럼 만만하진 않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적어도 사회적 차원에선 넘쳐나 보인다. ‘진보 교육감’이니 ‘시장주의 교육의 폐해’니 하는 말들도 그 질문과 관련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실제 삶에서, 말하자면 아이 교육에서 교육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에 따른 잔가지 질문들을 하고 정직하게 실천하는 사람은 참 드물다. 인문학의 위기를 개탄하고 인문학의 부흥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썩 다르진 않다. 그들은 단지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현실이….”
도저한 인문학적 지식과 여러 진지하고 소중한 인문학적 노력들이 그 한마디로 연기처럼 날아간다. 인문정신의 적은 과연 누구일까? 돈이 삶의 전부라고 돈이 행복의 지표라고 끝없이 주입하는 자본인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자본이 인문정신의 적이라 말하려면, 우리는 적어도 “그래도 현실이…”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 그 말의 정확한 의미는 ‘자본권력에 굴종해야지 어쩌겠어’라는 말, 즉 인문정신의 적에 대한 추레한 투항선언이기 때문이다.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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