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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한국사회] 더 많은 구미호가 필요하다 / 이승한

등록 2010-08-23 20:02

이승한 티브이 평론가
이승한 티브이 평론가
일본 유학 중 잠시 귀국한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타향에서 남의 말로 수업을 듣다 보니 언어인지학에 대한 생각이 좀 많아졌다며 한마디 한다. 사람들이 ‘다르다’와 ‘틀리다’를 헷갈리는 건 발음의 유사성보다는 인지오류 탓이 큰 거 같아. 요즘 들어 우리말글 바르게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절감하고 있는 나 또한 한마디 거든다. 그래, 어쩌면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하려는 무의식이 작용할 수도 있겠다.

“수적 다수에 속하지 않은, 뭔가 ‘다른’ 것은 ‘틀린’ 것이란 생각 때문에 그 둘을 은연중에 혼동한다.” 이런 생각은 우리만 하는 게 아닌지라,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 검색 엔진을 돌려보니 비슷한 이야기들이 주르르 나온다. ‘다름’과 ‘틀림’을 헷갈리는 한국인의 언어생활을 지적하는 수많은 인터넷 문서를 보고 있노라니, 자신과 다른 것을 두려워하고 일단은 한발 물러서고 보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타자/소수자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 차별의 이야기는 이제 한국인에게도 낯설지 않다. 한국 내 외국인 이주노동자가 어느새 55만, 한국 노동인구의 2.2%에 이른다. 게다가 2001년부터 2009년까지 집계된 국제결혼 건수는 27만7000여건. 다문화 가정 자녀들까지 합치면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머릿수는 어마어마해진다. ‘우리’ 안의 ‘그들’이 갑자기 증가하면서 그들을 경계하는 시선도 늘어난다. 이주노동자 범죄 현황을 들먹이며 치안을 위해서라도 그들을 추방해야 한다는 식의 언사가 인터넷에 창궐한다.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사냥하듯 단속한다.

‘나와 다른 소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당대의 고민은 티브이에도 반영된다. 올해 안방극장에 공개된 두 편의 구미호 드라마가 약속이라도 한 듯 구미호란 존재를 ‘오인당한 타자/소수자’로 다루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인간들의 손에 박해를 당하고 절규하는 구미호 모녀의 이야기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오늘(24일) 마지막 회가 방영될 예정이고, 그저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자신의 미모를 시기한 아낙들의 모함 탓에 실패한 구미호가 주인공인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는 극의 초반을 착실히 달리고 있다.

물론 구미호를 ‘오인당한 타자/소수자’로 다룬 것이 처음은 아니다. 2008년 판 <전설의 고향>에서 이미 가문의 부귀영화를 위해 구미호의 운명을 타고난 가문의 여식들을 대를 이어 살해해 그 간과 피를 내어 먹는 탐욕스러운 남자들이 등장한 바 있다. 이런 재해석이 계속되는 데에는 아마 기존의 구미호 전설이 워낙 자주 반복된 주제인지라 원형 그대로만 가지고는 시청자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티브이를 당대 무의식의 충실한 거울로 생각하는 내 입장에서는 수적 다수의 인간들이 타자/소수자인 구미호를 오해하고 누명을 씌우는 서사가 반복되는 것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진짜 탐욕스러운 괴물은 구미호가 아니라 인간’이라 찔러 말한다. 나는 그 말이 마치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하고 오해와 아집으로 타자/소수자를 바라보는 우리가 괴물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괴물의 모습에서 벗어나는 것은 스스로가 괴물임을 인지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겐 ‘너희 모두는 다 괴물’이라 일갈해 줄 더 많은 구미호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시겠지만 필자는 지금 꼭 티브이 이야기만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이승한 티브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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