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시인
집에서 나와 산 지 햇수로 팔년째다. 그사이 별별 일들이 참 많았고 이를 홀로 겪으면서 나름 세상살이에 내성이란 게 생겼다 싶은데 그때마다 처음인 듯 두려워하는 게 있다. 한밤중 혹은 잠결에 느닷없이 쏟아지는 큰비다. 이를테면 천둥이나 벼락 따위를 동반한 폭우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죄짓지 말자, 아니다 죄 안 지었다, 몇번을 되뇌다 보면 문득 내가 찾는 게 신이 아니라 사람이 아닐까 싶어진다. 그것이 외로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사람들이 결혼이라는 걸 하나, 부모의 채근이 적잖이 이해되는 요즘이다.
비가 오면 일부러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신이 나 집에 달려가던 한 시절이 있었다. 중학생이던 어느날 내 등짝을 때리며 엄마가 말했다. 어머, 너 당장 브래지어 차야지 못쓰겠어. 그렇게 어른이 된 후 나는 우산을 버려본 적이 없다. 비가 오면 일부러 교복에 맨발로 슬리퍼를 신고 친구와 팔짱을 낀 채 시내를 활보해도 부끄럽지 않던 한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생이던 어느날 내 귓가에 다가와 친구가 말했다. 어째, 나 남자친구가 생겨버렸어. 그렇게 어른이 된 후 나는 우산을 버려본 적이 없다. 비가 오면 일부러 중국집에 죽치고 앉아 짬뽕 국물에 고량주를 시켜놓고 선후배들과 비밀을 공유하기 바빴던 한 시절이 있었다. 대학생이던 어느날 한 선배에게 속없이 사랑을 말했다. 글쎄, 미안하지만 나는 네 사람이 아닌 것 같아. 그렇게 어른이 된 후 나는 우산을 버려본 적이 없다.
집에 들어와 현관문을 여는데 신발장 벽면에 세워둔 긴 우산이 연이어 쓰러져 포개진다. 도합 네 개다. 혼자 사는 집에 우산이 넷이라니, 엄마가 봤다면 혼쭐이 났겠다 싶어 애써 외면하는데 신발장 서랍 속에서 접이식 우산이 세 개 더 나온다. 혼자 사는 집에 우산이 일곱이라니, 엄마가 봤다면 매 좀 들었겠다 싶어 애써 감춰볼 요량으로 두리번거리는데 웬걸, 가방 속에 들어 있던 접이식 우산 하나가 더 추가된다. 혼자 사는 집에 우산이 여덟이라니, 엄마가 봤다면 헤픈 딸 때문에 슬펐겠다 싶었는데 이상하지, 변명거리가 자꾸만 생기는 것이다. 마른하늘에 비 내릴 적 많았는데 난들 어쩌라고.
곤파스라는 묘한 이름의 태풍이 또다시 북상중이다. 생각만으로도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사람도 있고,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당신을 생각하는 나도 있다는 멜랑콜리한 노래들을 즐겨 부르던 한 시절이 있었건만 나는 언제부터 이 비라는 걸 이다지도 두려워하게 된 걸까.
비가 오면 한숨부터 쉬게 된 건 직장인이 되고 나서부터인 듯싶다. 그렇게 어른이 된 후 나는 이른바 걱정을 걱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가 오면 허름한 전집에서 막걸리를 한잔하고 싶어도 내일의 출근 걱정과 내일의 뱃살 걱정과 내일의 후회 걱정으로 애먼 비만 물고 늘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어른들의 못된 버릇을 나도 모르게 배워버린 것이다.
요즘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다는 원빈의 영화 <아저씨>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니들은 내일만 보고 살지? 난 오늘만 산다! 원빈이 이 대사를 읊을 때 객석에서는 여자들이 멋있다고 악을 쓰며 자지러진다고들 한다. 원빈이 멋있기도 하겠지만, 대사가 완벽하기도 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인생이 아닌가. 되도록 비를 맞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인생이지만 어쩌다 비를 맞을 수밖에 없는 어찌할 수 없음도 인생이니까.
아파트 천장에서 물이 샌다. 관리사무소 아저씨를 기다리는데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받쳐둔 세숫대야 위로 똑똑 떨어진다. 숲 속 작은 집 처마 밑에서 듣는 빗방울 소리 같다. 음, 노력하면 걱정도 낭만이 아니될까!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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