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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프리즘] 10만명 먹여살린다던 그 천재는… / 최우성

등록 2010-09-05 18:44

최우성 산업팀장
최우성 산업팀장
‘작지만 강한 나라’.

세상만사에 무덤덤한 사람들조차 가끔은 가슴을 뛰게 만드는 한마디다. 땅덩이는 좁은데다 외세에 이리저리 짓눌렸던 상흔이 깔끔히 씻기지 않은 마당에, ‘작지만 기 펴고 사는 세상’을 누리고픈 생각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욕망에 가깝다. 정치경제 영역의 담론으로 탈바꿈할 잠재력이 큰 이유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카드를 꺼내 들고 나온 건 참여정부였다. ‘강소국론’이라는 브랜드도 만들어졌다. 하지만 참여정부 초기 기세등등했던 일부 386세력이 강소국론이라는 드라마의 화려한 주연배우였다면, 작가나 연출자는 그 뒤에 숨어 있다. 바로 삼성경제연구소(SERI)로 대표되는, 재벌 주도의 싱크탱크들이다. 주연배우들은 노-사-정의 강고한 사회협약을 통해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북유럽 나라들을 떠올리며 드라마를 ‘해석’했을지 모르나, 불행하게도(!) 대본에 숨어 있던 참뜻은 정작 따로 있다고 보는 게 맞다. 작가나 연출자에게 중요한 건 조건과 목표 사이의 불일치를 해결할 경제학적 논리였다. 작다라는 ‘제약조건’ 아래 강한 나라라는 ‘목적함수(목표)’를 극대화하는 해법? ‘될 놈 밀어주자’. 당시 이들이 제시한 최적해법의 ‘생얼’은 이랬다.

사실 ‘큰물’에서 노는 대표기업만이 우리의 희망이라는 메시지는 그보다 몇 년 전부터 이미 싹트기 시작한 ‘천재론’이 본격적으로 꽃피우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94년 3월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회장은 “21세기엔 1명의 천재가 1만명, 10만명을 먹여살린다”며, ‘천재대망론’의 싹을 처음 틔운 바 있다.

어쨌거나, 너나없이 대표주자를 밀어주는 일에 힘을 쏟았다. 수출 대기업들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정부정책은 맛뵈기에 가까왔다. 수출 대기업들은 종종 수출가격에 견줘 국내 소비자가격을 상대적으로 높게 매기며 말 그대로 ‘소비자잉여의 침탈’을 일삼았지만, 이는 국제무대에서 펼칠 마케팅 혈전의 종잣돈 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대표기업의 매출이 올라가고 국외 유수언론의 찬사가 이어질 때마다, ‘워너비 강소국’ 사람들의 자긍심도 덩달아 커졌다. 마치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는 우리 선수들의 활약상에 흠뻑 취하는 꼴이랄까.

하지만 축구와 경제는 엄연히 다른 법. 월드컵과 같은 행사에 국가대표로 참가해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으로 선수들의 역할은 끝날지 모르지만, 세계시장을 주름잡는 대표기업들이라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누군가를 밀어주는 일의 옳고 그름을 떠나, 밀어준 대가를 응당 바라기 마련이고 또 바라야 하는 게 엄연한 세상 이치다.

그렇다면 눈앞의 현실은?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6%를 웃돌 것이란다. 명목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우리 경제가 어림잡아 1000조원대 규모이므로, 올해 국민 전체 주머니 크기가 지난해보다 대략 90조원 이상 늘어난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국내 600대 상장사의 올 상반기 전체 순이익은 모두 45조5000억원. 공교롭게도 그 절반에 이른다. 문제는 이 돈 가운데 정작 대부분의 국민에게로 돌아갈 몫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뿐, 대부분은 외국인 배당으로, 기업 유보금으로, 극소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월급으로 흘러든다는 점이다. 청년 4명 중 1명이 사실상 백수라는 요즘, ‘6% 성장률’의 신기루를 깨는 현실은 널려 있다.

천재를 찾는 일, 키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건 천재가 거둔 성과를 ‘뭇사람’들에게 고루 나눠주는 일이다. 둘 사이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다면 서둘러 이어야 한다. 재벌 총수에게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게 행복일지는 모르나, ‘천재는 많되, 쪼들리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난다’는 건 사회엔 분명 불행이다.


최우성 산업팀장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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