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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곽병찬 칼럼] 공정사회로 가는 불온한 길

등록 2010-09-07 20:08수정 2010-09-07 21:33

곽병찬 편집인
곽병찬 편집인
그때처럼 정의란 말이 넘쳤던 시절은 없다. 관공서·마을회관·학교의 이마에 해당되는 곳엔 ‘정의사회구현’ 구호가 걸려 있었다. 한국판 수용소군도라는 삼청교육대는 이 지침에 따라 운영됐다. ‘그분’의 반짝이는 이마를 보면 ‘정의’ 두 글자가 무작정 떠올랐다.

아무리 맘에 안 든다고, ‘공정사회’ 구호 앞에서 그때 그 ‘정의사회’를 떠올리는 건 심했다. 총칼로 정권을 잡은 것도 아니다. 고문으로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다. 게다가 지금 이 정부는 수족 같은 국무총리와 장관 후보자들을 내쳤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눈앞에 두고 외교통상부 장관도 경질했다. 공정한 대통령은 아니라도, 노력하는 대통령 정도로는 봐줄 수 없는가.

그러나 2년 반 전 정권 출범 때의 기치와 면면을 생각하면 선뜻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고소영’ ‘강부자’ 내각으로 출발해 부유층 감세와 서민복지 감축, 재벌 몰아주기와 투기 활성화 정책은 물론 교육·의료·복지에서 신분과 부와 건강까지도 대물림하는 정책을 밀어붙였다. 반면 자본과 권력을 비판하고 저항하는 약자와 비판세력들은 아예 도시게릴라, 반국가사범으로 토벌하다시피 했다.

지금 재벌들이 시퍼런 서슬 앞에서 ‘상생’과 공정사회를 복창하고, 족벌언론이 곁눈질하며 숨소리를 죽이는 걸 보면, 일단 정부 의지는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검찰과 경찰이 정권의 주구로 되돌아가고, 정보기관의 사찰기능이 부활하고, 그 과정에서 직전 대통령이 죽음으로 내몰렸으니, 공정사회란 말에 습관적으로 귀부터 씻고 본다.

그렇다고 정의와 공정성 논의의 바탕인 인간의 선의에 대한 믿음까지 버린 건 아니다. 돌고 돌아서 이제야 본래의 선의로 돌아오고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기득권 수호자들이 빈정거리며 말하듯이, 대통령은 공정한 사회의 비전과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너무 추상적이다. 그래서 정치적 구호로만 들린다.

요즘 힘을 발휘하는 건 공정성의 잣대가 아니다. 탈·불법에 대한 최소한의 제재이자 특혜와 편중의 조정일 뿐이다. 사퇴한 총리·장관 후보자들이 저지른 행위는 사법처리의 대상이다. 법치가 제대로 서지 않은 상태에서 공정성을 운위하는 건 망발이다. 이전엔 3000~4000건이던 최저임금 위반 사례가 이 정부 들어서 1만여건으로 급증했는데도 올해 들어 형사처벌이 한 건도 없었다면, 이건 공정사회를 거론하는 게 부끄러운 불법사회다.

공정한 사회는 법치보다 몇 길 위다. 신분·학력·지연 등의 요소에 따른 차별을 배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장애인이나 소수자 그리고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에게 좀더 많은 기회를 보장한다. 그런 사회에서라면 공직자는 합리적 수준의 불평등도 감수할 것이고, 배곯는 학생이 눈치 안 보고 밥 먹을 수 있을 것이며, 그들에게 좀더 많은 배움의 기회를 주는 데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이명박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언급한 “출발과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 패자에게 또다른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와도 성격이 같다.

지금 우리 사회는 비정상이 정상, 불공정이 공정으로 여겨질 정도로 병증이 깊다. 심지어 법치와 불법도 혼동한다. 때문에 정상 혹은 공정한 상태로 되돌리려는 노력은 정치적·이념적으로 불온시된다. 이미 재계, 언론계 그리고 여당 안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나온다. 김무성 원내대표는 공정사회의 기준을 인민재판에 빗댔고, 다른 의원은 “길로틴을 만든 사람, 길로틴에서 처형됐다”고 빈정댔다.

자유를 향한 길엔 구속이, 평등엔 차별이, 정의엔 억압이 따랐다. 반칙과 특혜가 없는 사회를 꿈꾸던 대통령은 반칙으로 세상을 떠났다. 공정한 사회로 향하는 길도 그렇다. 이 대통령이 존경한다는 사도 바울처럼 억압자에서 피억압자로 전면적인 거듭남이 없으면 갈 수 없다. 그런 길을 그가 갈 수 있을까.

곽병찬 편집인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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