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시인
그 시절 사람도 아닌데 그 시절 노래들을 오래 좋아하는 나다. 내게 그 시절이라 함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60년대 후반에서 간신히 뜀박질을 배웠던 70년대 후반 정도를 뜻하는데, 여섯살 때였나, 그러니까 한 82년 정도 되었으려나, 늦은 밤 이모 방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그대로 울어버린 적이 있다. 어떤 근원 모를 슬픔 같은 게 치밀어서였다. 어떤 곡절 모를 사연 같은 게 있다 싶어서였다.
그들이 통기타 그룹 ‘트윈폴리오’라는 것과 그때 들은 노래가 ‘웨딩케이크’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어느날 나는 전생을 점쳐줄 수 있다는 한 역술가 앞에 앉아 그가 콧방귀처럼 핑핑 뀌어대는 말들을 콩 줍듯 귀에 담느라 정신없었다. 죽어 환생한 지 얼마 안 되었군그래, 여직 뜨끈뜨끈해, 아버지랑 유독 친하지? 그 세대들이랑 찰떡이야.
추석 연휴 때 세시봉 출신 가수 여럿이 텔레비전에 등장했다. 녹두전 먹다 말고 털썩 주저앉은 나는 간만에 본 그들이 너무도 반가워 잠시도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가을 명절을 기념하며 크리스마스캐럴을 부르자 하는 그들의 센스가 유쾌해서만은 아니었다. 기타 반주가 시작되자마자 어떻게 알까 싶었는데 모든 노랫말을 다 따라 부르게 되는 우리들의 향수가 생생해서만도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혼자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저 두터운 유대감, 아무렴 다 알고 말고, 가 그대로 드러나는 친구들의 우정이 못내 부러웠기 때문이다.
물론 사십년 세월 동안 그들이 함께일 수 있는 건 노래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밀고 당기며 살아온 덕분일 게다. 내 노래를 네가 네 노래로 부를 수 있고, 네 노래를 내가 내 노래로 부를 수 있는 몸바꿈의 자유로움, 그 너 나 없음의 너 나 있음 사이에서 나는 퍽 쓸쓸해졌다. 내 처지란 걸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던 탓이다. 너를 껴안으려면 그만큼 내가 자리를 내어야 하고 너에게 안기려면 그만큼 내가 다가가야 하는데 나는 늘 제자리에서 맴맴 돌았다. 내가 점점 외로움을 느낀다면, 그게 매라면 나는 맞아 죽어도 싸리.
며칠 전 조영남 아저씨를 만나 수다를 떨다 그의 입에 습관처럼 따라붙는 말법 하나를 발견했다. 보통 ‘내 친구들은’이라고 해야 할 대목마다 그는 ‘우리 친구들은’이라며 둥그런 원의 무리를 지었던 거다. 왜 요즘 우리 세대들은 세시봉 아저씨들 같은 친구 되기가 쉽지 않은 걸까요, 물론 그런 쫀쫀한 관계들도 많겠지만 저부터도 없거든요. 아저씨가 말했다. 개인이 살아 있어서 그래, 저 휴대폰이라는 게 우리 때는 없었던 거잖아, 그게 오히려 관계를 참 망치는 거거든, 우린 말이야 너니 나니 따위의 그런 파워게임 안 해. 말끝에 아저씨가 그랬다. 근데 있지, 친구들이 하나둘씩 가고 있어, 장영희도 갔고 김점선도 갔어, 근데 실감이 안 나, 지금이라도 당장 밥 먹자고 나오라고 할 것만 같단 말이지.
아저씨를 만나고 온 이틀 뒤 그의 ‘여친’ 중 한 사람인 최윤희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뉴스를 접했다. 충격이 컸다. 별별 말들이 쏟아졌다. 들을 구석은 듣고 버릴 구석은 버리면서 나는 ‘행복전도사’라는 별칭을 누가 그녀에게 붙여준 것인지 그것이 못내 궁금해졌다. 그로 유명해졌으나 그로 감출 수밖에 없는 또하나의 얼굴로 그는 분명 고통스럽기도 했을 것이니.
밤기운이 쌀쌀해져 두툼하게 덮을 겸 벽장에서 이불을 꺼냈다. 서로 다른 색의, 서로 다른 크기의, 서로 다른 무늬의 천 조각이 촘촘하게 바느질된 조각이불이다. 이런, 친구를 부러워하다 그만 이불까지 끌어들였네. 오늘 밤 친구 없는 나는 이불이나 꽁꽁 싸고 자보련다.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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