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호 논설위원
고려의 대문장가 이규보는 과거에 급제하고도 10년 가까이 관직을 못 얻었다. 그가 사록겸장서기라는 낮은 자리라도 받은 것은 <천엽류화시>(千葉榴花時)라는 시로 집권자 최충헌의 마음을 산 32살 때다. 그는 “일찍이 동해를 기울여 탁류를 저절로 맑게 하는 물결이 되었고, 남산의 대를 모두 베더라도 공을 기록하는 붓이 모자랐을 것”이라고 최충헌을 칭송했다. 40살 때인 1207년에는 최충헌의 집 정자를 두고 쓴 <모정기>(茅亭記)로 직한림이라는 더 높은 벼슬을 받았다. “정자가 날개 달린 듯 봉황이 나는 것 같으니, 누가 지었는가 어진 우리 진강후(최충헌)로다. … 잔 들어 만수무강을 비오니, 산이 변하더라도 정자는 옮겨지지 않으리.” 무신 집권기 고려에선 과거 합격자도 알아서 벼슬을 찾아야 했던 터여서, 주옥같은 시편을 남긴 그도 출세하려면 낯뜨거운 아부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몇 편의 글로 출셋길을 연 이로는 중국의 허신(何新)도 있다. 문화대혁명으로 하방돼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그는 1989년 <밍바오>(명보)에 천안문 사태는 중국을 분열하려는 적들의 조종 때문이라는 등의 주장을 담은 글을 기고하면서 장쩌민 국가주석 등 당시 권력 핵심과 가까워졌다. 그는 지금도 강대국으로서의 중국 등 중화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강조하는 대표적인 관변 지식인이다.
미국산 쇠고기 협상 실패의 주역인 민동석씨가 느닷없이 외교통상부 제2차관으로 내정되자 많은 이들이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그 배경을 두고 지난 7월 나온 민씨의 책 <대한민국에서 공직자로 산다는 것> 때문 아니냐는 말이 있다. 촛불집회를 내란·계급혁명으로 비난하는 그의 책은 촛불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온 이명박 대통령 등의 생각과 맥이 닿는 듯하다. 그렇더라도 그의 글에선 한 가닥의 아취도, 나름의 정리된 주장도 찾을 수 없다. 막말과 욕설뿐이다. 대통령은 뭐가 그리 맘에 들었을까.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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