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영 인디고 유스 북페어 팀장
“한은, 올해 한국 경제 성장률 6% 예상”, “IMF, 내년부터 한국 경제규모 13위 진입 예상”, “G20 경제적 효과 20조원 예상”.
경제를 살리겠다는 공약을 내건 대통령을 필두로 대한민국 정부는 초심을 잃지 않고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경제성장을 추구하고, 그 성과를 그 어떤 일보다 가장 기뻐하고 있다. 채소 가격이 올라 마음껏 장을 보지도 못하는 판국이지만, 방송이며 신문에서 한국의 경제성장 예견을 자축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정말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 믿고 싶어지기도 한다.
지난 10월29일은 1994년 한국이 반도체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제정한 ‘반도체의 날’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날을 ‘축하’가 아닌 ‘애도’의 방식으로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반도체 생산의 최하층 라인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은 각종 희귀병에 걸리며 속수무책으로 죽어야 했지만, 산업재해로도 인정받지 못해 그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책도 마련하지 못했다. 과연 우리는 이렇게 도덕적으로 미숙한 성장을 마냥 훌륭하다 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 사회 경제성장의 오점을 발견할 수 있다. 짧은 기간에 우리나라가 눈부시게 이룩한 경제발전은 전적으로 개인 혹은 소수집단의 희생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좀더 풍요롭고 편안해지기 위해서 개인들에게 부여된 인내와 고난의 시간들은 당연한 것처럼 요구되어 왔다. 그것에 대해 국가적인 보상과 해결을 요구할 때면 ‘이기적인 요구’라며 핀잔받아야 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겪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만 해결되어서는 안 되는 문제는 공적으로 다루는 것이 정당하다. 그것을 이기적인 요구이고 무능력한 책임회피라 보는 것은 사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핍박받고 피해받는 자에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경제가 발전한 것인지, 혹은 성장한 것인지 물어본다면 대답은 분명 그 반대일 것이다. 그들이 겪는 빈곤과 소외는 경제지표로 환산되지 않고, 따라서 경제 규모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엄연히 그 고통은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 우리의 경제성장은 얼마나 더 고통을 감수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개인들에게 의존할 것인가?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질병과 가난에도 끄떡 않고 묵묵히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는 ‘슈퍼맨’이 되어서 국가와 기업에 봉사하고 희생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것이 정당하게 인정되는 부당한 경제성장을 언제까지 축하하고 있을 것인가?
우리나라는 국제적 경제지표들에 의하면 이미 너무나 부유한 국가이다. 그러니 그 기준들에 기대어 더 많이 갖기 위해 발버둥치는 탐욕스러운 경제대국이 아니라 좀더 윤리적인 경제대국이 될 필요가 있다. 전태일이 자신의 몸을 불사른 지 40년이 지났다. 청년 전태일은 분명 제대로 된 경제성장을 통해 올바른 경제 선진국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모든 노동자들의 목소리로서 자신의 몸을 태웠을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는 만족스러운 풍요를 제공하지만 그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고통스러운 희생을 강요한다면, 이를 성장과 발전이라 부를 수 없다.
경제 선진국이 되길 바라는 우리 정부와 국민들의 염원이 부디 이 땅의 약자들이 가난하고 고통받고 있기에 아직 우리는 빈곤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기를, 그리고 이러한 빈곤을 극복하는 과정으로서 경제성장을 촉구하는 것이기를 꿈꾼다. 이러한 경제 선진국을 추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풍요로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윤영 인디고 유스 북페어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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