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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다정한 약속은 매정한 실천으로 / 김민정

등록 2010-11-03 20:29수정 2011-04-01 17:41

김민정 시인
김민정 시인
본격적인 가을이고 보니 주말마다 결혼식장 다니느라 바쁘다. 지난 토요일에도 도합 세 건의 결혼식이 있었고 이번 토요일에도 청담과 남산, 두 곳을 에둘러야 한다. 길일이란 게 있으니 한날임을 피할 수 없음은 어쩔 수 없겠지만 시간까지 겹치고 보면 대략난감인 채로 친분의 정도랄까 그 가늠 앞에 절로 서게 되는 것이다. 돈만 보낼 것이냐 아니면 몸에 돈을 실을 것이냐. 그즈음 전화벨이 울린다. 문자메시지도 연이어 도착한다. 민정아, ○○ 결혼식에 갈 거지? 봉투 좀 부탁해, 네 계좌번호 꼭 찍어주고. 그제야 나는 확실히 알게 된다. 아, 나는 ○○와 아주 친하구나.

봉투를 부탁한 이들이 꽤 되는 탓에 결혼식장 앞 은행 현금인출기에서 없는 돈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 가방 깊숙이 집어넣는다. 흰 봉투를 여러 장 받아든 채 화장실로 가서는 변기 위에 앉아 검지에 침을 묻혀 가며 돈을 세고 이를 제각각의 봉투 속에 나눈다. 사람마다 불러준 액수가 달랐으므로 봉투 뒷면에 까만 사인펜으로 정확하게 이름 쓰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그제야 나는 확실히 알게 된다. 아, 너는 ○○와 별로 친하지는 않구나.

‘친’(親)이라는 글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슬아슬 시소를 타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결혼식장에서 내가 줄곧 하는 일이란 이를테면 두리번거림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과 오랜만에 만났으나 반갑지 않은 얼굴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 참 좁다, 그치? 애써 눈을 맞추게 되는 얼굴들과 애써 눈을 피하게 되는 얼굴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대화란 싱겁기 그지없어 애꿎은 신랑 신부만이 빈번히 도마 위에 올라앉게 된다. 신랑이 말상이네, 신부 팔뚝이 소시지야, 두 사람의 가족 내력부터 연애 내력까지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국수 불어터지는 줄도 모르고 해대다 보면 아, 그래 그건 죄라서 우울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다들 결혼들 하고 평범하게들 사는데 너는 뭐가 그렇게 잘났냐. 사촌동생의 예식을 마치고 집에 내려가는 엄마의 전화였다. 난 나중에 웨딩드레스 같은 건 절대로 안 입을 거야, 인신공격 얼마나 심하겠어. 결혼식 같은 것도 절대로 안 할 거야. 이거 완전 돈 내고 밥 먹기 아냐. 나는 양가 가족들끼리 조촐하게 밥이나 먹고 여행이나 푸지게 떠날 거야.

예식 끝에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습관처럼 휴대전화를 열었다. 그간 마치 전화번호가 없어서 연락을 못했다는 투로 엄살을 떨었는데 어럽쇼, 번호가 있다. 그것도 최근에 바뀐 번호로까지 저장되어 있다. 마치 몰랐다는 표정으로 다시금 불러주는 대로 입력을 하면서 평소처럼 말을 보탰다. 우리 얼굴은 보고 살자, 내가 곧 연락할게.

늦은 밤 메일함을 여니 뉴욕에서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번역가 언니로부터 메일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보고 싶다는 마음은 우리 서로 확인했지요? 그럼 우리 언제 어디서 만나는 건가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국만 와보세요, 없는 운전면허 당장 따서 전국일주 시켜 드릴게요,라고 날렸던 나의 공수표가 이렇듯 불쑥 돌아와 얼굴을 내민 까닭이다.

“왜 서울에선 친구들끼리 미리 약속을 하지 않는 걸까? 만나고 싶은 사람일수록 미리 약속을 잡아 확실히 해두고 그 약속을 기대하는 시간을 갖고 싶은데. 다정한 약속일수록 연약하다. 정말로 왜 그럴까?”

정말로 왜 그럴까. 블로그에 올라온 언니의 글을 읽으며 제 발 저린 김에 생각해봤다. 역시 약속은 다정이 아니라 매정해야 지켜지는 법. 저기 담에 봐, 하고 손 흔들며 지나가는 친구가 있고, 다이어리 펼친 채 언제 봐? 하고 쫓아가는 친구가 있다고 하자. 기대하시라, 돌아보면 그 친구, 아마도 나일 테니.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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