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서유럽식 사민주의의 대표적인 나라이자 ‘구좌파적 사유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라 여겨지는 포스트모던의 원조인 프랑스에서 10대들이 ‘계급투쟁’과 ‘자본주의 반대’를 외치며 거리를 누비고 있다. 최근엔 문제의 핵심은 금융자본이니 은행에서 계좌를 빼버리자는 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들은 사르코지 정권에서 촉발된 문제를 사르코지를 ‘쥐 같은 놈’이라 욕하며 카타르시스하고 마는 게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사유하고 그 본질로 접근하고 있다. 문제의 본질을 사유하고 본질로 접근하는 그들은 아마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상황은 프랑스만의 상황이 아니라 유럽 전역의 상황이기도 하다. 지속되는 신자유주의 금융화로 ‘자본주의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으로 여겨지던 사민주의가 유명무실해지면서, 고통과 불안정에 빠진 유럽 인민들은 총파업과 대규모 시위 등을 통해 현실에 대한 좀더 분명한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유럽 정치 또한 빠른 속도로 급진화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에 포섭된 사민주의 정치도 세를 잃는 대신 자본주의 반대를 분명히 하는 사회주의 정치가 힘을 얻고 있다.
프랑스와 유럽의 상황은 한국과 극명히 대비된다. 극우 성향의 한나라당이 중도보수를 표방하고 전통적인 보수(자유주의)정치 세력인 민주당은 진보복지를 표방하는 반면, 진보정당이라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우경화를 거듭한 끝에 이젠 보수(자유주의)정치와 구분하기 어려운 지경이다. 더 급진적인 정치세력이 발붙일 데조차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유럽 정치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급진화하는데, 신자유주의 금융화로 인한 인민의 고통과 불안정이 유럽보다 훨씬 심각한 한국 정치는 오히려 문제를 뭉뚱그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상황의 갈피를 잡아야 할 이른바 진보 지식인들의 모습은 더욱 심란하다. 프랑스에선 10대들이 ‘계급투쟁’과 ‘자본주의 반대’를 외치며 거리를 누빈다지만, 그보다 더 힘차게 ‘계급투쟁’과 ‘자본주의 반대’를 외쳐도 시원찮을 사회의 진보 지식인들이 ‘계급’이나 ‘자본주의 반대’를 글로벌한 감각을 가진 사람은 해선 안 되는 촌스럽고 낡은 말로 여긴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이명박이다.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이미 이명박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이명박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게 그들의 진보적 실천이다.
그러나 오늘 현실은 이명박의 단독 작품이 아니라 고용 없는 성장과 불안정 노동을 밀어붙이며 자본의 투기활동으로 인한 손실을 정직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떠넘기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그 흐름을 무작정 추종해온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세 정권의 합작품이다. 이건 어떤 편향된 좌파적 견해가 아니라 그저 팩트이며 상식이다. 프랑스 10대들의 상식이며, 근본 있는 경제학자지만 자신이 좌파가 아님을 분명히 하는 장하준씨도 몇년 새 반복하고 있는 이야기다.
한국의 진보 지식인들은 이명박 정권 교체를 ‘상식의 회복’이라 말한다. 이명박식 신자유주의에서 김대중·노무현식 신자유주의로 돌아가는 게 상식의 회복이라는 이야기다. 우리가 이명박보다 더 시급히 빠져나가야 할 게 바로 이 상식이라는 이름의 몰상식이다. 이 몰상식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한 우리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요컨대 우리의 상식은 이 불의한 세상이 김대중·노무현·이명박의 합작품이라는 사실을 불편함을 무릅쓰고 인정하는 순간부터 회복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수도에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지속을 모의하는 G20 회의가 열리고 있다.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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