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 2.1연구소 소장
내가 한국의 학자들이나 경제학자들을 다 만나본 것은 아니다. 어쨌든 내가 만난 한국 학자 중에서 “정말 이렇게 공부 잘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게 입 딱 벌어졌던 사람이 세 명 있다. 세상의 평가는 어떨지 모르지만, 그중에 제일은 권헌익 교수였고, 그다음이 장하준 교수와 이제 슬슬 은퇴를 준비하시는 서울대 경제학과의 이지순 교수였다.
물론 이지순 교수는 한국의 많은 경제학자들이 그렇듯이 아직은 그를 대표할 책이 없어서 일반인들은 잘 모른다. 그렇지만 한국의 경제학자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지순 교수였던 셈이다. 어떻게 보면 <88만원 세대>를 시작으로 지금 진행중인 12권의 대장정 시리즈를 쓸 용기를 냈던 것이 이지순 교수식 발상의 전환 덕분이다. 마음속으로는 그를 진짜 은사라고 생각하고, 내가 발간한 책들을 전부 보내드리는 분이기도 하다. 그가 나에게 질문했다. “만약에 박정희가 산업화할 때, 유신 방식 대신 요즘 식으로 말하는 생태적 경제를 전개했다면 우리가 지금보다 못살았을까?” 언젠가 나는 그의 질문에 답을 하고 싶은데, 아직은 그럴 수준과 형편이 못 된다.
장하준이 수년 전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과연 모든 경제적 제도를 다 없애고 시장 하나만을 단일 기구로 숭배한다면 ‘경제 발전’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 질문은 독일 역사학파인 리스트의 오래된 ‘사다리 걷어차기’의 질문이기도 하고, 스웨덴식 복지경제의 틀을 만들어낸 군나르 뮈르달의 질문이기도 하다. 대체적으로 한국의 주류 경제학계나 정치인들 혹은 재계의 경제인들은 “그딴 질문 필요 없다”고 지난 10년 동안 장하준을 영국 사람 취급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와 함께 아주 혼동스러우면서도 너저분한 시대를 보낸 지금, 장하준이 던진 질문 혹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서 마이클 샌델이 던진 질문에 한국 국민들은 격렬하게 반응하였다. 2000년 김용옥이 <노자와 21세기>라는 인문서적으로 세웠던 모든 기록을 마이클 샌델이 올해 전부 갈아치웠는데, 그 기록을 이제 장하준이 모두 갈아치울 형국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난 10년, 먹고사느라고 너무 바빴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국 혹은 한국 경제를 둘러싼 근본적인 질문을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소소한 몇 가지 정책 논쟁을 ‘의제 설정’이니 어쩌구 하면서 기술적 논의만 조금 했지, 정의, 도덕, 제도, 시장과 같은 근본에 해당하는 질문들을 빼먹고 간 것 같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이런 논의들이 대학과 계간지 같은 것을 통해서 일상화되고, 국민들도 ‘시민토론’ 등의 형태로 계속 토론을 하고, 이런 것들이 정치권을 통해서 대표되는 그런 상황으로 가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린 그렇게 안 했고, “돈이면 최고다”라는 경제근본주의의 시절을 보냈다. 학자라는 게, 원래 남는 시간이 많아서 남들 다 아는 것 같은 근본적인 얘기를 다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장하준은 좋은 학자이다.
지난 수년 동안 내가 본 가장 안타까운 사건은 권헌익 같은 좋은 학자가 한동안 시간강사를 하다가 런던의 정경대학(LSE) 교수로 가버린 일이다. 만약 그가 계속 한국에 있었다면, 많은 대학원생들이나 박사과정생에게 정말 좋은 스승이 되었을 것 같다. 그가 한 얘기는 더 간단하다. “고전으로 돌아가자.” 그 얘기를 한국은 못 알아들었고, 영국은 알아들었다.
장하준 다음의 질문은 권헌익의 질문이 되면 좋겠다. 정치권이 알아먹든 못 알아먹든, 장하준과 함께 한국 국민들은 이미 선진국 국민이 된 것, 그게 장하준 사건의 교훈 아닌가? 이런 국민과 독자들이 너무 자랑스럽다.
우석훈 2.1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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