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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그러나 우리는 늘 시를 산다 / 김민정

등록 2010-11-24 21:03

김민정 시인
김민정 시인
내 이름 옆에 종종 ‘시인’이라는 껌이 딱지처럼 붙어 있는 걸 본다.

여고 졸업 후에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이 가끔 그 껌딱지를 보고 연락을 해올 때가 있다. 그러면서 말한다. 시집 좀 사인해서 보내봐, 한번 읽어나 보자. 처음에는 그 마음을 고마움으로 알아 일일이 주소를 불러라, 몇 권이나 보낼까, 아름답게 응대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 마음이 차가움으로 얼어갔다. 웬만한 서점에서는 다 파니까 가서 좀 사라, 누가 인천 짠물들 아니랄까 꼭 그렇게 티를 내냐.

문제는 그로부터였다. 하루는 서점에 간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야, 여기 서점인데 네 시집 없대. 네 이름 말하니까 탤런트 김민정이 언제 시집도 냈냐고 그래. 나는 출판사 이름을 말해주고 시집 코너로 다시 가보라고 했다. 코너라고 할 것도 없어, 여기 시집 몇 권 꽂혀 있지도 않다니까. 그래도 인천에서는 나름 유서 깊은 서점이었다. 교복 입은 내가 자율학습 땡땡이치고 슬리퍼 신은 채로 서서 기형도나 시운동 동인의 시집을 사가기도 한 서점이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대략의 모양새가 그려졌다. 나는 인터넷 서점에서 내 시집 몇 권을 주문했다. 쓸쓸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그 많은 시집은 다 어디 가 있단 말인가.

몇 해 전 한 출판사에서 시집 시리즈를 기획하고 편집하는 일을 맡았다. 밤낮없이 시집 만드는 재미에 푹 빠져 한 달이 멀다 하고 신간을 펴냈다지만 문학을 중심으로 삼는 회사가 아닌 탓에 종종 많은 이들과 부딪쳐야 했다. 하루는 한 마케터가 회의 중에 내게 물었다. 시집, 꼭 그렇게 하셔야겠어요? 창고가 난리예요, 재고 때문에, 대체 팔리지도 않는 걸 왜 이렇게 내는지 원. 꼿꼿했던 허리가 풀어지면서 순간 내 하이힐이 비칠, 했다. 모든 책은 다 한 편의 시이거든요. 참나, 먹고살기도 힘든 마당에 시는 무슨 시예요, 돈도 없어 죽겠는데. 존댓말을 유지하던 평정심이 무너지면서 순간 내 입에서 반말이 가래처럼 튀어나갔다. 야, 너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이러고 사니.

지금껏 시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 앞에 나는 종종 무릎을 꿇어왔다. 말이 안 나오니 몸이 알아서 구부러졌다. 답답했다. 영화 <시>를 봤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시가 뭔지 알지 못하면서 오늘도 나는 시집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명백한 모순인 걸 알지만, 이 일로 얻은 행운이라면 시집으로 묶이지 않은 시인들의 따끈따끈한 속살을 가장 먼저 만질 수 있다는 것이고, 불운이라면 그들의 감각에 치여 내 시의 촉을 잃고 놓치게 된다는 것 정도랄까.

나는 자주 서점에 나가는 편이다. 시집 매대는 그야말로 소박한 밥상이다. 국도 밥도 반찬도 메뉴가 다양하지 않다. 말마따나 그 나물에 그 밥일 때가 태반이다. 초판 2000부를 찍으면 평균적으로 절반도 채 소화하기가 힘들다는 시집 시장에서 몇 만을 훌쩍 넘는다는 우리나라 시인의 수를 가늠해봤다. 간혹 어떤 시인의 시 구절이 떠오르지 않을 때 시집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검색창에 시 제목을 찾고 있는 나의 습관에 대해서도.

여의도에서 홍은동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데 대낮에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 채 서 있었다. 창 너머로 내다보니 흰 푸들 한 마리가 도로 한복판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머리에는 빨간 리본이, 네 발에는 빨간 신발이, 몸에는 빨간 니트를, 묶고 신고 입은 채였다. 누가 작심하고 갖다버린 거구만. 그러나 누구 한 사람 차에서 나와 개를 안아들지 않았다. 여기저기 사람들의 차에서 다양한 소리의 클랙슨이 짜증스럽게 울려나와 뒤섞였다. 두리번두리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채로 꿈쩍 않고 선 푸들 한 마리의 우직한 위태로움, 나는 거기서 시를 보았다.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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