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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감세=증세’라는 괴상한 논리 / 박현

등록 2010-11-28 21:29

박현 경제정책팀장
박현 경제정책팀장
1974년 어느 날 경제학자 아서 래퍼가 워싱턴 한 식당에서 고위 정치인 및 언론인과 만났다. 나중에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때 각각 부통령과 국방장관을 지낸 딕 체니(당시 백악관 자문관)와 도널드 럼스펠드(백악관 비서실장), 그리고 <월스트리트 저널> 기자가 자리를 함께했다. 래퍼는 냅킨에다 세율이 조세수입에 미치는 영향을 그림으로 그렸다. U자를 뒤집은 모양이었다. 그는 세율이 곡선의 정점에서 내려가는 부분에 있다고 말했다. 세율이 너무 높아 조세수입이 줄어든다는 의미였다. 오히려 세율을 낮춰야 조세수입이 증가한다는 논리를 폈다. 이 주장은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래퍼곡선’으로 명명돼 유명해졌지만, 근거가 부족해 이를 받아들인 경제학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로널드 레이건은 달랐다. 그는 자신이 이를 경험했다고 주장했다. 2차 세계대전 때 영화로 돈을 벌고 싶었으나, 전시에 최고세율이 90%까지 높아진 소득세가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몇 편만 만들고 시골로 내려가야 했다는 것이다. 세율이 높아 근로의욕이 떨어졌다는 얘기다. 이 이론을 받아들인 그는 1980년 대선 때 대규모 감세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다. 재임 기간 그는 소득세율을 70%에서 28%로 내렸다.

결과는 어땠을까. 조세수입은 오히려 감소했다. 그 여파로 미국은 90년대 중반까지 재정적자에 시달렸다. 민주당 빌 클린턴 대통령이 세율을 인상해 재정흑자로 돌려놓았다. 그러나 2001년 공화당 부시 행정부의 감세로 다시 적자로 반전됐다.

세율 인하를 통해 노동 공급과 투자 확대를 유도하려 한다는 점에서 래퍼와 레이건의 견해는 ‘공급경제학’이라 불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저서에서 “경제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공급경제학을 도외시한다”며 “실증적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보수파 경제학자인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도 “역사적 경험은 래퍼의 추측이 틀렸음을 증명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보다는 최고세율이 80%였던 스웨덴 같은 곳에서 더 적용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이 이론이 채택된 것은 보수 정치권과 언론이 열렬히 지지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강경우파는 유권자의 환심을 사고자 이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 논리를 충실히 전파했다. 일부 경제학자와 관료가 여기에 영합했다.

강만수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이 26일 강연에서 감세 철회 논쟁을 또 비판했다. ‘엠비노믹스’의 설계자인 그는 1980~90년대 중반 자신의 세제실 경험을 예로 들며 “세율이 내려갈 때마다 세입은 늘었다”고 주장했다. “세금을 올려 적자를 해결한 역사는 없다”거나 “감세가 종국적으로 증세정책”이라고도 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찬사도 논거로 내세웠다.

그러나 당시 한국 경제는 연평균 9%가 넘는 고성장을 했던 때다. 고성장을 하면 세수는 저절로 늘어난다. 더군다나 고성장의 동력은 세율 인하라기보다는 저임금을 기반으로 한 수출 확대였다. 노동자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열심히 일했고, 성장 단계의 기업들은 중화학과 정보기술(IT)로 주력산업을 전환하면서 투자 수요가 많았다. 그래서 세율 인하가 세수를 늘렸다는 것은 논리 비약이다. 강 특보는 또 미국의 대규모 감세정책이 낳은 결과도 잘못 해석하고 있다.

우리나라 재정은 이미 대규모 감세와 4대강 사업으로 압박받고 있는 상태다. 여기에 남북관계 경색으로 군비 지출의 고삐마저 풀릴 조짐이어서 대통령 경제참모의 왜곡된 인식이 매우 우려스럽다.

박현 경제정책팀장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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