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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사르트르와 리영희 / 함석진

등록 2010-12-06 20:22수정 2010-12-07 09:10

함석진 기자
함석진 기자
때로 글처럼 무력한 것이 없다. 그것은 추위, 배고픔, 전쟁의 고통에 있는 단 한 사람도 구제하지 못한다. 삶은 늘 지금 당장의 문제다. <구토>, <말>을 쓴 장 폴 사르트르는 1964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그해 <르몽드>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죽어가는 어린아이 앞에서 <구토>는 아무런 힘도 없다”고 고백했다. 몇달 뒤 그는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됐으나 이 상마저 거부했다. 그에게 글은 ‘세상을 향한 적극적인 말 걸기’여야 했다. “작가의 기능은 아무도 이 세계를 모를 수 없게 만들고, 아무도 이 세계에 대해서 ‘나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도록 만드는 데 있다.”(<문학이란 무엇인가>, 1947년) 그의 ‘앙가주망’(참여)은 그렇게 지식인의 긴장, 양심과 저항을 물었다. 사르트르는 나치의 지배를 받던 시절이 가장 자유로웠다고 말했다.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매일 정면으로 모욕을 당할 때 난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었다.” 옴짝달싹 못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몸짓 하나하나는 앙가주망의 무게를 지녀야 했고, 그것이 바로 자유라고 했다.

리영희 교수는 “사람은 저항함으로써만 자신을 확정해나간다”는 사르트르의 생각을 받았다. “그럴수록 악덕한 제도, 정치, 사상에 굴종하지 않는다는 저항적 인간을 목표로 해야겠지. 시시한 물건 따위에 만족하지 말고 스스로의 사상과 행동을 결정하는 주인이 되는 거야.”(<리영희 프리즘>, 2010년) 홍세화는 그 책 서문에서 “(그는) 우리가 왜 이 시대를 ‘편안하게 죽어가는’ 대신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지 이유를 캐묻고 있다”고 썼다.

레지 드브레는 지식인이 멸종할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의 척박한 운명을 예고했지만 위로가 되지 않는다. ‘주인’ 없이 부유하는 글들은 오늘도 온통 ‘전쟁과 포격’이다. 큰 스승을 보내는 하루, 그 공백이 크다.

함석진 기자 sj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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