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호 논설위원
동아시아 해적의 대표는 왜구(倭寇)다. 한반도 남쪽에선 1350년부터 왜구가 급격히 늘어 1370년대에 정점으로 치닫다가 왜관이 설치된 1409년을 전후해 많이 줄어든다. 조선 조정이 무력토벌과 함께 교역 허용 등 유화책을 편 탓이 클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 학자는 왜구의 발생과 소멸은 주로 일본 내의 정치상황 때문이라고 본다. 1350년 막부 세력의 공격을 받게 된 규슈의 호족이 군량미 확보를 위해 한반도 남해안을 침입하기 시작했다거나, 내란 와중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내몰려 먹고살기가 어려워진 규슈 지역의 무사·상인·농민 등이 통제가 느슨한 틈을 타 한반도 약탈에 나섰다는 분석이 그런 것이다. 당시 왜구의 본거지였던 규슈 마쓰우라 지역에서 지역 토착세력이 해적질 대신 어업에 정착하면서 왜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연구도 있다.
16세기 중국 해안에서 극성을 부렸던 후기 왜구의 소멸도 비슷하다. 1550년대 명나라가 대대적으로 왜구 토벌에 나선 데 이어, 200여년간 계속되던 명나라의 해상무역 금지령이 1567년 일부 해제되면서 애초 밀무역을 위한 ‘반상반도’(半商半盜)였던 왜구는 크게 줄었다. 여기에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정권이 무역 특권의 중앙 집중과 통상로 확보를 위해 해적단속령(바한 금령)을 내리고 교역 허가제(주인선 제도)를 시행하면서 왜구는 사실상 종식됐다.
한국과 말레이시아 해군의 선원 구출작전 성공 이후 소말리아 해적들과의 군사적 충돌이 한층 격해질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그것만으로 될까. 소말리아 해적 사건은 오랜 내전 끝에 대체권력으로 떠올라 해적 단속에도 나섰던 소말리아 이슬람법정연대가 축출된 직후인 2007년부터 다시 크게 늘었다. 소말리아 어부들이 애초 해적질에 나선 것도 외국 어선들의 불법 조업 때문이었다고 한다. 달리 먹고살 길도 없었을 것이다. 문제의 근원부터 살필 일이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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