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
<고래가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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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 전 새사연(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손석춘 선생에게서 들은 이야기. 손 선생이 연구소를 구상할 무렵 박원순 선생에게 함께하면 어떨지 의논했던 모양이다. 구상을 들어본 박원순 선생이 그러더란다. “손 선생이 하시려는 건 민중 기반의 운동이고 제가 하는 건 시민 기반의 운동이니 따로 하는 게 효율적이지 싶습니다.” ‘민중 기반의 운동’에 속한 나는 박원순 선생과 견해가 종종 달랐고 두어 번 직접적인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고 박 선생이 매우 양식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태도는 적어도 한국 사회에선 매우 특별한 것이다.
박원순 선생 말마따나 사회엔 시민 기반 운동(개혁이라 불리는)도 필요하고 민중 기반 운동(진보라 불리는)도 필요하다. 시민 기반 운동이 민중 영역까지 포괄하기 어렵고 민중 기반 운동이 시민 영역까지 포괄하긴 어려우며, 꼭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서로를 존중하며 각자의 역할을 해내면 된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급부상한 시민 기반 운동엔 민중까지 포괄하는 운동인 양 과장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즐겨 사용해온 말이 ‘진보 개혁 세력’이라는 말이다. 그 말은 대세가 된 시민 기반의 운동에 민중 기반의 운동을 귀속시키기 위해 사용되어왔다.
그런데 근래 들어선 아예 ‘개혁’을 떼버리고 ‘진보’로 가는 형국이다. 이를테면 오연호, 조국 선생이 얼마 전 낸 책의 제목은 <진보집권플랜>이다. 이런저런 지당하고 좋은 이야기들이 들었지만 결국 골자는 이명박 정권 교체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선거 연합, 즉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을 중심으로 하는 정권교체를 주장하는 책이다. 과연 그런 정권교체가 ‘진보집권’인가? 며칠 전 한 노동운동가가 나에게 보내온 편지를 읽어보자.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노무현이나 이명박은 그 밥에 그 나물입니다. 저는 ‘열혈 노사모’였습니다. 노무현이 대통령 되니 세상 좋아진 줄 알고 노조 가입해서 비정규직 투쟁하다 노무현 정부에 의해 구속되고 해고되었습니다. 저야 구속 정도로 끝났지만 수많은 노동자들은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아직 그 노동자들의 유언과 얼굴을 가슴에 박고 사는 저 같은 사람들은 혼란스럽습니다. 함께했던 동지들도 ‘통합과 연합’이 ‘현실이고 대세’라고 합니다. 그쪽으로 안 가면 영원히 낙오할 것 같은 불안감마저 듭니다.”
물론 오연호, 조국 같은 분들에게, 즉 개혁적인 중산층 엘리트들에게 이명박인가 노무현인가는 ‘그 밥에 그 나물’이 아니다. 그들에게 이명박인가 노무현인가는 정권은 물론 학술, 문화, 방송, 엔지오(NGO) 등의 헤게모니를 ‘우리가 갖는가 저들이 갖는가’가 달린 절체절명의 일이다. 그들에게 그런 정권교체가 세상이 뒤집히는 수준의 변화라는 것, 그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변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을 존중한다.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정권교체를 굳이 ‘진보집권’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 정권교체를 진보집권이라 부르는 건 그런 정권교체로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이명박이냐 노무현이냐가 그 밥에 그 나물인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폭력이다. 진보란 먹고사는 데 별 걱정이 없는 중산층 엘리트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변화를 대다수 인민들을 위한 변화라 과장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에겐 충분한 변화더라도 대다수 인민들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라면 변화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오연호, 조국 선생이 이제라도 <진보집권플랜>이라는 책 제목을 좀더 양식 있게 바꿔주길 정중하게 요청한다. ‘시민집권플랜’ 혹은 ‘민주집권플랜’쯤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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