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영 인디고 유스 북페어 팀장
이윤영
인디고 유스 북페어 팀장
인디고 유스 북페어 팀장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주민등록번호가 사라진다면? 평생을 살아온 집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고, 평생을 일한 직장에서도 쫓겨난다면, 그래서 더 이상 ‘존재하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다면? 인디고 유스 북페어 프로젝트를 위해 방문한 슬로베니아에는 ‘지워진 사람들’(The Erased)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슬로베니아가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할 1991년 당시, 비슬로베니아 민족 가운데 비합법적으로 영주권을 박탈당한 1만8305명이 그들이다. 그들은 건강, 교육, 고용, 거주 등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들마저 빼앗겼고,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워진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여권이 발행되지 않아 이들은 다른 국가 영주권을 취득하기 위한 출국조차 불가한 상태라고 한다.
‘지워진 사람들’은 또한 그들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단체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단체의 특이한 점은 다양한 사람들의 자발적이고 민주적인 참여 형태에 있다. ‘지워진 사람들’에는 특별한 조직체계가 없다. 대표도 딱히 없으며, 공식적인 사무실도 없다. 하지만 슬로베니아어뿐 아니라 영어로 된 인터넷 웹페이지가 있으며, ‘지워진 사람들’의 권리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모은 잡지도 두 가지 언어로 출판되고 있다. 이것들은 비록 ‘지워진 사람’은 아니지만 “나의 능력을 이용해 우리 사회에서 반드시 공존해야만 할 이들과 함께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작업물들이다.
이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은 디자인 회사 포퍼(Poper)이다. 포퍼는 언론에서 은폐하려는 ‘지워진 사람들’의 존재를 사회에 알리는 홍보물을 제작하고 있는데, 그 방식이 아주 간단하면서도 획기적이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신호등과 버스 정류장 등 사람들이 잠시 ‘기다리는’ 장소에 17년 동안 국민이 되기를 ‘기다린’ 이들의 이야기를 써 놓는다. ‘기다림’이라는 공통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지워진 사람들의 고통에 더 쉽게 공감할 수 있다. 더 놀라운 것은 포퍼가 이러한 방법을 고안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들은 형식이 아니라,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에 초점을 맞출 때 가장 아름답고 창의적인 디자인이 탄생한다고 말했다. 포퍼가 ‘지워진 사람들’에 대한 홍보물을 디자인할 때에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이 세상에 전달되어야 할 지워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엇인가였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어떻게 들릴 수 있도록 할지, 보이지 않는 그들의 존재를 어떻게 보이게 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소통 가능한 디자인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치가 디자인, 혹은 예술에 대한 그들의 철학이다.
우리 사회에서 지워진 사람들이 누구인지 다시 생각해보았다. 우리나라의 무국적 난민, 이주노동자, 탈북자…. 그리고 그 범위를 인간의 존엄이 지워진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과연 얼마만큼 들리고 있는가? 우리 사회, 나아가 이 세상에 수많은 ‘지워진 사람들’이 다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힘은 버젓한 양식과 그럴듯한 지원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데 더 마음을 쏟을 때 더 효과적이고 아름답게 창조될 수 있지 않을까? 세계디자인도시라는 서울을 필두로 한 디자인 과용의 한국 사회가 반드시 새겨야 할 ‘이야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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