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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예종석의 오늘 점심] 장국밥

등록 2011-02-27 19:28

탕반의 원조는 역시 장국밥이다. 지금이야 설렁탕이나 곰탕이 더 흔해졌지만 예전에는 장국밥을 많이 먹은 모양이다. 개성의 장국밥은 예로부터 평양의 냉면, 전주비빔밥과 함께 조선의 3대 음식으로 손꼽힐 정도였다.

19세기 말의 <규곤요람>은 “장국밥은 국수 마는 것과 같이 하는데 밥만 마는 것이다. 밥 위에다 기름진 고기를 장에 조려서 그 장물을 붓는다”고 했다. 혹자는 장국밥이 장터에서 많이 팔아 마당 장(場)자를 쓰는 줄 아는데 이처럼 간장으로 간을 하기 때문에 젓갈 장(醬)을 쓰는 것이다. 월탄 박종화는 “맑은장국은 값비싼 양지머리로만 큰 가마솥에 집어넣고 끓였으니 맛은 진하면서 국물 빛은 맑아져 물에 장을 풀어놓은 듯 가볍고 맑다”고 했다.

1800년대에는 서울 곳곳에 장국밥집이 성업을 이뤘다. 장국밥집은 출입구에 하얀 종이로 만든 술을 장대에 높이 달아 표지로 삼았다고 한다. 청계천 인근 무교탕반의 명성은 전설처럼 전해진다. 세도가는 물론 임금조차 미복 차림으로 드나들 정도였다고 한다. 소설가 조용만은 1930년대의 문화계를 회고하는 글에서 “그때 무교탕반은 값이 30전이었다. 설렁탕이나 냉면, 비빔밥이 다 10전이었는데 무교탕반만 그 세곱절이었다. 그렇게 받을 만한 것이 맛이 달랐다. 국물이 뽀얗게 진하고 비싼 움파를 곁들인 고기산적을 넣고 국수를 알맞게 넣어 맛이 별미였다”고 회상했다.

식품사학자 이성우 교수는 탕반이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도 사회 발전에 따라 외식이나 단체급식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나타난 것”이라고 분석한다. 찾아보기 힘들어진 장국밥을 서울 수서동의 조선면옥에 가면 맛볼 수 있다.

한양대 경영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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