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시인
김민정 시인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아부다비의 한 호텔이다. 2011년 아부다비 국제도서전에 한국은 마켓 포커스로 초청을 받았고, 이를 축으로 아부다비와 두바이에서 주최한 한국의 문학 관련 여러 행사를 치르기 위해 나는 몇 분 선생님과 한 비행기에 올라 장장 11시간을 함께 날았다. 장거리 비행을 할 때면 여지없이 마주하게 되는 창문 밖 깜깜, 그리고 간헐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기체의 묘한 흔들림… 그 순간마다 내가 연필 굴려가며 쓰는 메모는 늘 빤한 맥락의 레퍼토리다.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는 답 모르겠고 답 알기 싫고 답 안다 해도 사는 데 별 도움 안 되니 아예 알려고도 안 했던 그 물음과 그 답 말이다. 그러나 부지런한 우리들의 승무원 언니들 덕분에 생각은 더 이상 꼬리를 물지 못한다. 세상에 항공사는 많고 우리가 먹을 기내식 또한 그만큼 다양하니까.
애초에 계획된 행사는 아랍에미리트에서 이집트까지 아랍의 두 중심국가로 무대를 옮기면서 빽빽하게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웬걸, 그새 덜컥 이집트에 봄이 찾아왔다. 예상치 못한 이른 봄이었으니 꽃구경하면 참 좋으련만 아직 우리가 찾아가 꽃 볼 지경까지는 아니라고 했다. 사실 꽃이야 한번 심으면 매번 피었다 지고 졌다 피기를 반복하니 그저 때를 기다리면 되는 일 아닌가. 바로 그 희망으로 재스민 향기가 아랍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가는 걸 지켜보는 중이었는데 아 이건 또 뭔가요… 취업 이후 첫 출장으로 일본을 간 제자 녀석이 강도 9.0이라는 상상 초월의 대지진을 겪으며 목도한 그 두려움과 공포를 실시간으로 제 페이스북에 중계하고 있었다.
달나라도 가고 별나라도 가는 세상이면 뭣하겠나. 빛의 속도만큼이나 빠르다는 인터넷을 통해 나는 눈물 모양 이모티콘만 반복해서 흘려주며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허둥거려서는 안 된다, 저도 실천할 수 없고 실천해본 적 없으므로 하등 쓸모없는 파이팅만 외쳐댔다. 레고 블록을 가지고 놀 듯 우리를 쌓았다가 부서뜨렸다가 집어던졌다가 한데 몰아버리는 자연 앞에서 그저 속수무책인 것 말고는 달리 방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침묵으로, 그저 탄식으로 텔레비전 앞을 지키고 있던 나는 문득 꾸리고 있던 내 여행용 가방을 쳐다봤다. 채 일주일도 안 되는 여정인데 빵빵하게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짐을 넣는 것도 모자라 아직 자라지 않은 눈썹까지 걱정하며 눈썹뽑개를 찾고 있는 내 욕심이라니. 휘 둘러 집안 곳곳을 살펴봤다. 아직 포장 벗겨 입어보지도 않은 옷들이며 책장 한번 넘겨보지도 않은 책들이며 요리도 안 하면서 겹겹이 쌓아올린 온갖 그릇들하며… 지금 당장 지진이 난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챙겨나갈 것인가 곰곰 떠올려봤지만 머릿속은 그저 하얬다.
잘해야 손에 잡히는 손지갑 정도겠지 싶어 지퍼를 여니 거기 엄지손톱만큼 작은 워리 돌(WORRY DOLL)이 들어 있다. 내 걱정을 덜어준다는 과테말라 원주민들의 이 색색의 작은 인형을 보는 순간 이상하지, 전 세계 오지에서 다른 그 무엇이 아닌 제 몸을 협상 카드 삼아 자연과 대화하며 살아가는 민족들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고 위대하다는 확신이 드는 것이다.
호텔에서 나와 도서전으로 향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반쯤 접힌 메모지가 잡힌다. 가방에 술에 화장품에, 이웃 나라에서는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면세점에서 사올 이따위 품목들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 리스트를 버리고 나니 내 마음이 한 뼘쯤 자란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검은색 천으로 온몸을 가린 아랍 여성들이 너도나도 어깨에 멘 명품 가방의 로고를 좇고 있는 나라니, 쯧쯧 지금껏 착한 척은 왜 했나 모르겠다.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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