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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천년왕국 이야기 1 / 김규항

등록 2011-03-23 20:05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자본주의는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었지만 시장과 경쟁을 기반으로 하기에 불평등과 빈부격차를 수반하는 사회체제다. 죽도록 일하다 죽어버린 다섯살 아이의 부모가 자식의 고통을 멈춰준 신에게 감사 기도를 하던 초기 자본주의의 풍경은 자본주의 본연의 모습이다. 그런 자본주의가 그나마 사람이 살 수 있는 꼴을 갖추게 된 건 인민의 삶을 반영하는 정치, 좌파정치의 성장 덕이다.

핀란드의 자본가가 인민들은 몇만원 내는 자동차 범칙금을 수억원을 내는 이유는 그 자본가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투철해서가 아니라 우파정치를 견제하는 강력한 좌파정치가 그런 가치기준과 제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파정치 일색의 한국은 이건희와 정몽구같은 자본이 정치와 법과 공권력과 미디어까지 지배하며 왕처럼 군림한다. 좌파정치만 억제할 수 있다면 자본주의는 말 그대로 자본의 왕국이다.

한국의 자본이 좌파정치를 억제하는 방법은 두 시기로 나뉜다. 극우독재 시절엔 좌파는 모조리 ‘간첩’으로 몰아 죽이면 되었지만, 민주화가 되고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문제는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전직 좌파들, 즉 80년대에 열혈 좌파청년이었으나 서른을 넘기고 마흔을 넘겨 좌파적 신념은 접고 정치니 학계니 언론이니 문화계니 주류 사회에서 편히 살기로 한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우선 ‘내가 달라졌다’고 말하지 않고 ‘세상이 달라졌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우리가 달라진 세상의 좌파다’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조갑제류의 간첩사냥이 더는 먹히지 않는 인민들에게서 좌파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기막힌 말도 만들어냈다. ‘비현실적’이라는 말이었다. 90년대 내내 그들은 옛 친구들을 ‘80년대식 좌파 교조에 사로잡힌 비현실적인 인간들’로 만들면서 ‘달라진 세상의 현명하고 현실적인 좌파’로 성장해갔다.

그들이 처음 집권했을 때 자본은 일순 긴장했으나 이내 안심하게 되었다. 그들이 극우독재 세력과 철천지원수일 뿐 자본에는 매우 충직했기 때문이다. 집권 10년 동안 그들은 자본을 위해 다음과 같이 일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대규모 정리해고, 공무원노조 탄압, 비정규직 400만명 증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강행, 미국 용병으로 이라크 침략전쟁 파병, 노사관계 로드맵 추진, 비정규직 악법 제정, 동북아 금융허브 추진을 통한 투기자본(론스타, 상하이자동차 등)의 먹튀 허용, 미군의 100년 주둔 평택미군기지, 새만금 등 경제 위주의 생태 파괴, 원전 건설 추진, 경찰에 의한 노동자·농민 학살, 노동자 2000명 구속.

그 10년에 낙심한 인민들은 ‘우파고 좌파고 소용없고 경제라도 살리자’며 이명박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물론 이명박이 인민의 편일 리 만무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나 이젠 몸도 마음도 거덜이 난 인민들 앞에 선거를 앞둔 그들이 다시 찾아와 속삭이고 있다. ‘힘드시죠. 이게 다 이명박 때문이잖아요. 힘을 모아야죠. 이번엔 진짜 잘해드릴게요.’ 그리고 최근에 합류한 몇몇 전직 좌파들이 소리 높여 거든다. ‘세상이 변했잖아요. 이게 진짜 현실적 진보고 좌파예요.’ 인민들은 고단함에 젖어 만사가 귀찮다는 얼굴이지만 짐짓 그 요사스러운 말들에 귀 기울이는 눈치다.

그들은 집권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이 집권하든 못하든, 한국의 자본은 드디어 영원히 좌파정치의 씨를 말릴 기회를 잡았고 천년왕국의 실현을 목전에 두고 있다. 과연 한국의 좌파들은 이 험악한 시절을 통과하면서 소멸하지 않고 좌파정치의 싹을 살려낼 수 있을까? 돈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인 세상을 향한 걸음을 지속할 수 있을까?(다음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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