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시인
오래 연락이 끊겼던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누구세요, 누구시냐고요, 제 친구 아무개는 죽었습니다만…. 그간의 소원함을 한꺼번에 털어버리는 유의 호들갑스러운 멘트를 계속 날렸더니 워워, 나를 진정시키는 친구. 네게 꼭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거든, 다음주에 시간 좀 내라. 나 소개팅 안 하거든. 어럽쇼, 누가 시켜는 준대? 사실 이런 대화의 끝이라 하면 열에 아홉은 청첩장이 걸려 있게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만나자마자 친구가 내민 것은 테두리에 금박을 입힌 그것이었다.
데이비드? 어, 스코틀랜드인이야. 하다하다 결국 스코틀랜드까지 가는구나. 친구의 첫 연애 상대는 폴란드인이었다. 너도나도 삐삐를 차고 다니던 대학 시절, 그 커플이 초면의 나를 앞에 두고 어눌한 영어 문장들을 구사하며 말싸움을 벌이던 풍경을 나는 이게 뭔가 하고 물끄러미 바라본 적이 있었다. 전화해달라는 남자의 호출에 짜증이 난 친구가 18이라는 숫자를 계속 찍어댔다고 했던가. 친구의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 느는 동안 그녀 곁을 스쳐간 남자들은 호주, 영국, 미국, 아무튼 내가 기억하는 건 거기까지였다.
그러나 친구가 웃음 끝에 꺼낸 얘기에 난 곧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고등학교 때 1등의 숫자 1 아니면 취급을 안 했던 선배 언니가 유학 중에 자살을 했다는 거였다. 명문 의대 나와 명문 코스로 장학금 받아 유학을 간 언니는 학교에서든 학원에서든 수업 시간이면 늘 엎드려 잠만 자곤 했다. 그래도 선생님들은 가만 내버려두었다. 쟤는 그래도 되는 애, 우리는 그러면 안 되는 애들. 나 같으면 복에 겨워 하루하루 참 살고 싶었을 거야, 대체 뭐가 아쉽다고. 늦어지는 데이비드에게 전화를 걸며 친구가 혀를 찼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걸 아니까 죽을 수밖에 없었을 거야, 너무 외로워서.
때마침 교복을 입은 한 무리의 여고생들이 커피숍 안으로 왁자지껄 들어섰다. 멋을 부렸다고는 하나 색색으로 골라 신은 운동화가 다였는데도, 예뻤다.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왜 우리는 우리가 하나같이 참 예쁜 사람들이라는 걸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는 걸까.
아랍에미리트는 어땠어? 여행광인 친구도 미처 가보지 못한 나라라고 했다. 하루는 호텔 일식집에서 밥을 먹는데 주방장은 미얀마인, 보조는 네팔인, 서빙은 마케도니아 여자가 보더라. 이름 대신 필요할 때마다 제 나라들을 호명하는데 그때마다 그 사람들 입꼬리가 활짝 올라가는 거야. 환한 거야. 점점 외국인들 봐도 너나 같은 구분이 없어지는 것 같아.
두바이의 한 뒷골목을 다닐 때였나, 일행들과 무심코 걷다 화들짝 뒤를 돌아보는 우리들이 있었다. 길 건너편에 우리와 뭔가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는 이들이 눈에 띄었는데 그들 역시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우리를 향한 매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들이구먼. 멀리서 봐도 딱 안다니까. 일행 중 연세가 있으신 어른들은 그런가 보다 하고 발길을 돌리는데 나는 아니었다. 외국인들에게는 눈웃음 팍팍 날리면서 그들 앞에서는 눈싸움하듯 얼어붙어 버리는 거, 내가 처음으로 맞닥뜨린 분단의 체험이었으니 말이다.
아랍 남자들이 대시는 안 했어? 연애광인 친구도 미처 섭렵하지 못한 지역이 중동권이라고 했다. 대시는 무슨, 근데 나는 왕이 공작새 사주며 덤벼도 거기서 못 살 것 같아. 왜, 더워서? 아니,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돼지고기 못 먹잖아. 이런 봄에는 돼지비계 기름에 부친 파전에다 막걸리 마시고 좀 퍼지는 게 제맛인데.
데이비드를 만났다. 키가 2m도 넘는 그의 친구 매슈도 함께였다. 세계는 넓고 남자는 많다지만 알아주시라, 내겐 역시 한국 남자가 최고다.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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