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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예종석의 오늘 점심] 갈비탕

등록 2011-04-10 19:54수정 2011-04-10 21:19

우리나라는 불교가 성했던 신라시대 이후 육식을 규제해왔다. 그러다 고려 말 몽고의 침범 이후 그들의 영향으로 다시 육식에 눈을 뜨게 된다. 조선조에 와서도 육식 금지의 전통은 이어지나 그 맛에 눈뜬 백성들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듯하다. 오죽했으면 송시열이 <우암집>에서 “우리나라 풍속은 우육을 상미로 삼았으며, 이것을 먹지 않으면 죽는 것으로 아니 도우금지령이 아무리 내려도 돌보지 않는다”고 한탄을 했을까.

우리 문헌에서 쇠갈비에 관한 기록은 세종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1425년 종묘 영녕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올린 제수에 갈비가 나온다. 그러나 그때는 갈비라 칭하지 않고 갈비를 의미하는 협(脅)으로 기록되어 있다. 1604년의 <영접도감의궤>에 갈비(乫非)라는 명칭이 나온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 서책이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길이 없다. 1719년의 <진연의궤>에 소의 부위 명으로서 우각, 양, 간, 영통, 전각, 족 등과 함께 갈비(乫非)가 나온다. 1795년의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날 비자를 쓴 갈비(乫飛)가 나오고 갈비찜(乫飛蒸)도 나온다. 19세기 초에 정약용이 저술한 <아언각비>에는 “우협(牛脇)을 갈비(曷非)”라 한다 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조선시대에는 갈비라는 명칭이 한자로 다양하게 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언각비>는 또 “갈비 끝에 붙은 고기를 쇠가리라고 하는데 이것을 푹 고아서 국을 끓이면 좋다”고 했다. 오늘날의 갈비탕이다. 갈비탕이 왕실 행사에 오른 기록은 1892년의 <진찬의궤>에 처음 보이는데, 갈이탕(乫伊湯)이라고 했다. 서울 신촌과 방이동 등지에 점포를 두고 있는 ‘벽제갈비’는 국물이 진한 갈비탕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예종석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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