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정치부 선임기자
네 명이 다 그렇지만, 그중 지난주 세상을 등진 카이스트 박군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채 피어보지도 못한 19살의 청춘은 어린 시절을 보낸 인천 만수동의 한 아파트에서 생을 마감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행복했던 유년기 추억이 담긴 고향 동네를 찾아 몸을 던졌을까.
입학할 때만 해도 매사에 자신감 넘치고 희망에 부풀었을 이들이 연달아 극단적인 선택을 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카이스트라는 공간과 제도를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서남표 총장이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밀어붙인 징벌적 등록금 반환제와 100% 영어 강의, 재수강 제한 제도 등이 대표적으로 지목되는 요인들이다. 이것들이 얼마나 비교육적이고 실효성이 없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설령 방향이 옳은 제도라 하더라도 급격하게 추진하면 부작용이 있는 법인데, 독선에 가득 찬 빈껍데기 정책을 ‘개혁’이라며 밀어붙였으니 여린 싹이 질식하거나 “우리는 이 학교에서 행복하지 않다”고 절규하는 것은 당연하다.
과학 연구의 요람인 카이스트를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라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는 억압과 강제의 공간으로 변질시킨 일차적 책임은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에게 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개발시대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서 총장을 미국에서 초빙해 칼자루를 쥐여주고, 개혁 전도사라고 칭송한 이들이 정치권 등 기득세력이 아니던가.
그러나 젊은 벗들이여, 이 땅의 힘있는 자들을 맘껏 비판하되 거기에 머물지는 말자.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을 책임과 힘은 바로 그대들에게 있다. 카이스트를 경쟁 속에서도 즐겁게 학문할 수 있는 공부 공동체로 만들 수 있는 주체는 여러분 곁에 부랴부랴 달려온 교수들이 아니며, 여의도에서 뒤늦게 목소리 높이는 정치인도 아니다.
젊은 벗들은 지금까지 나랏돈으로 공부하고 있다는 부채감에 지레 주눅이 들어 그저 하라는 대로 밤낮없이 공부만 열심히 했을지 모른다. 좋은 성적 거두는 게 부모님과 나라에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하지만 고민 없이 순응한 결과가 어떤지는 명백해졌다. 한줄 세우기에서 뒤처진 동료들은 절망하거나 좌절하고, 경쟁에서 앞선 이들도 성취감보다는 끝없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강의실과 도서관, 기숙사만 다람쥐 쳇바퀴 돌듯 오가는 삭막한 곳에서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마크 저커버그가 나올 수 없다. 어쩌다가 특출한 천재가 성공하더라도 자기만 생각하는 괴물 과학자가 되기 십상이다. 지금 카이스트의 모습은 톱니바퀴의 작은 톱니가 아니라 작게는 한국 사회, 크게는 인류 전체에 공헌하는 과학인재를 양성한다는 설립 취지와도 크게 어긋난다.
젊은 벗들이여, 그대들을 단지 학점 따는 기계로 만들려는 모든 음모와 획책을 과감히 거부하라. 그러자면 먼저 “학교의 승인을 받지 아니한 집단행위 등”을 막고 있는 웃기지도 않는 서약서부터 찢어버려라. 그대들이 직면한 현실을 바로잡고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집단행동’ 등 집단지성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 조선시대 왕립기관인 성균관 유생들도 국가정책 등에 불만이 있을 때 수시로 집단 수업거부(권당)를 했다. 방황과 고민에 이은 저항은 젊음의 특권이자 지식인의 책무이다.
미래의 막연한 행복을 위해 현재의 불행을 감내하지 말고, 웃음과 낭만이 캠퍼스에 돌아오게 하라. 대신 우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대들이 카이스트의 울타리를 넘어 이웃들의 아픔에 눈뜰 때 우리 사회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김종철 정치부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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