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선 경제부 정책팀장
원자력에 대한 OECD 태도를 보면
구리아 발언의 맥락이 감 잡힌다
구리아 발언의 맥락이 감 잡힌다
발명왕 토머슨 에디슨, 그가 죽을 때까지 남긴 특허 수는 1000종을 넘었다. 어릴 적 읽은 위인전 제목은 ‘발명의 아버지’였다. 그 뒤로 나는 ‘아버지’가 단순히 부자지간이라는 생물학적 관계의 의미로만 쓰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추상화된 비유적 의미로, 그 방면의 창시자나 권위자를 가리키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앙헬 구리아 사무총장이 “이명박 대통령을 녹색성장의 아버지로 불러야 한다”라고 격찬했다. 지난주 서울에서 한국 정부와 오이시디 공동주최로 열린 ‘글로벌 녹색성장 서밋 2011’ 행사에서다.
현대 국어에서 아버지의 용례가 확장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 나간 게 아닌가 싶다. ‘엠비표 녹색’이 성장의 도구로 전락해가는 상황에서 추앙에 가까운 찬사라니. 여기에 엠비 측근 장관들이 ‘녹색 아버지’ 찬양에 끼어들지나 않았더라면 굳이 역대 군사정권의 용비어천가를 떠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딱히 립서비스만으로 볼 일도 아닌 듯하다. 이렇게 과도한 칭찬을 늘어놓은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한다.
오이시디와 한국 정부는 각자가 추진해온 성장 전략에서 조응하는 지점이 있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녹색성장을 새로운 국가성장 모델로 제시했고 오이시디는 올해 각료회의에서 녹색성장 전략보고서를 채택했다.
사실 녹색과 성장은 양립하기 힘든 가치이다. 어디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양쪽 입장이 확연히 갈린다. 성장 중시자들은 환경친화적인 기술과 산업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끌어들이려 하지만, 결국은 녹색을 산업적 측면에서 저울질하는 한계를 드러내고야 만다. 원전을 둘러싼 논란이 대표적이다.
우선 오이시디 자체가 원전 강국들의 집합체다. 재생 가능 에너지도 다루고 있지만, 엄연히 원전이 중심에 놓여 있다. “후쿠시마 사태와 같은 사고는 인간의 실수로부터 비롯된 문제이며 실수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을 중단할 상황까지는 아니다.” 오이시디가 산하에 원자력기구(NEA)를 두고 있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함께 원자력을 값싸고 깨끗한 에너지원으로 분류하고 있는 점을 상기하면 구리아 사무총장의 발언이 어떤 맥락인지 감이 잡힌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한낱 실수로 돌린 그의 인식은 그냥 나온 게 아닌 것이다. 그로서는 올해 오이시디 창설 50돌을 기념해 잔칫상을 차려준 한국 정부에 최고의 찬사를 선물로 안기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듯싶다. 하긴 일본의 원전 정책을 강하게 비판해온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조차 이 대통령 앞에서는 “한국의 원자력이 안전하게 추구되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또하나의 골칫거리는 녹색뉴딜 사업이다. 내년까지 40조원이 들어갈 핵심사업비의 절반이 4대강 사업에 쏠린 현실은 단기 재정 투입으로 경기부양을 꾀하려는 녹색성장의 실체를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녹색으로 포장된 국책사업의 대부분이 환경과 무관한 토목건설 사업이라는 것도 기가 막힌다.
이명박 대통령은 건설업체 사장 시절부터 공기 단축, 목표 달성 따위가 몸에 배어 있는 분이다. 그를 녹색성장의 아버지로 떠받들수록 성장과 속도에 강조점이 찍힐 수밖에 없게 돼 있다. 정부가 그린버블(녹색거품)을 우려하는 국외 투자자들을 상대로 1조원 녹색펀드를 끌어모으려다 ‘꽝’난 것도 다 성장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다 빚어진 해프닝이다.
바야흐로 복지 논쟁이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이참에 새로운 성장의 길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길 기대한다. 녹색 가면을 쓰고 성장을 외치는 것보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얘기하는 것이 솔직하고 현실적이지 않은가. hongd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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