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철 esc팀장
범인으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고
따라할 수 없는 그들만의 아이디어
따라할 수 없는 그들만의 아이디어
‘재벌들 참 머리 좋다.’ 최근 프린터 고장수리를 받으려다 든 생각이다. 삼성전자서비스의 ‘엔지니어’는 프린터를 보자마자 뚜껑을 열며 친절히 “이 부품을 교체해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알고 보니 이 프린터는 해당 부품의 잦은 고장으로 단종되어 버렸다. 엔지니어는 프린터를 언제 샀느냐고 물었다. 보증기간 1년을 넘겼으면 배보다 큰 배꼽 수준의 부품 교체 비용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입한 지 1년4개월 된 프린터, 고장이 나려면 일찍 나야 했는데 운 나쁘다 생각했다. 엔지니어는 제품 결함을 인정하면서도 보증기간은 어쩔 수 없다며 미안해했다. 리콜해야 할 제품을 슬그머니 단종시키고 보증기간까지 따지게 할 생각을 해낸 재벌의 머리, 얼마나 좋은가.
5년 전 증권시장을 담당할 때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재벌들 정말 머리 좋다.’ 자동차를 만들어 팔려면 운반은 꼭 해야 할 일, 이 일을 맡은 회사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일이 굴러들어온다. 글로비스의 전신 한국로지텍은 2001년 현대차그룹 정몽구·정의선 부자의 100% 출자로 설립됐다. 여기까지면 머리 좋다고까지 감탄할 일은 아니다. 입 벌어지는 건 다음부터. 회사는 식은 죽 먹듯 쑥쑥 성장하고 드디어 2005년 말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다. 주식은 액면가 이상으로 뻥 튀겨지기 마련. 이렇게 해서 글로비스 주인은 6만3000%라는 천문학적인 투자수익률, 세계 신기록을 세우게 된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잘 굴러갈 회사 세우고 때맞춰 주식 공개해 돈 쓸어모으겠다는 아이디어, 이런 거 아무나 세우는 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 그렇지. 삼성이든 현대차든 그 어마어마한 부를 쌓기까지는 뭔가 있었던 거다. 로또나 연금복권 당첨되듯 단순히 운 좋아서 자본권력의 제왕이 됐다고 하는 건 뭔가 사리에 맞지 않을뿐더러 기분 나쁜 일 아닌가. 범인으로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고 상상한다 해도 감히 따라할 수 없는, 그들만의 뛰어난 아이디어와 과감한 실행력이 천년만년 세세토록 누릴 부의 원천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서민들의 박탈감이 불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다만 치열한 성실성과 상상을 초월하는 두뇌를 못 지녀서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상대적 박탈감에서 벗어나 편해진 마음이 얼마 전 산산조각 나버렸다. 그런 뛰어난 아이디어는 주인 아닌 마름의 것이었다는 것. 한 재벌그룹 계열사의 고위 임원까지 지낸 한 인사와 저녁식사를 했다. “글로비스 아이디어 정말 좋지요? 세금 안 내면서 사업 물려주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어디 글로비스뿐인가. 그 아이디어 낸 사람이 있대요. 그 사람, 회사에서 엄청나게 칭찬받고 승승장구했었다지. 단번에 그 어렵다는 임원 자리까지 쉽게 올랐다니까.” ‘리콜 대신 단종’도 바쁘신 회장님이 신경쓸 일은 아니겠지 싶다. ‘리콜 대신 단종’ 아이디어를 낸 삼성맨은 최소한 부서 안에서는 인정받고 있을 것이다. 물론 글로비스 아이디어맨은, 훨씬 더 잘나가고 있을 터. “지금 어디서 뭐 하냐고? 글쎄….” 그는 말을 흐렸다. 빼어난 아이디어로 월급쟁이의 꿈이라는 대기업 임원까지 올랐고, 덕분에 북한에서도 잘 안된다는 3대 세습이 착착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데도, 그는 지금 밀려났다고 했다. 별수 있겠나, 주인 마음이지.
한국방송 장아무개 기자도 눈에 밟힌다. 민주당 도청 사건의 주인공으로 지목된 이. 4년차 기자가 그런 엄청난 일에 자발적으로 나섰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제아무리 주인의 눈에 들어 성공하고자 하는 것이 서글픈 마름의 꿈이라 해도. 더구나 한국방송은 재벌그룹도, 족벌언론도 아니지 않은가.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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